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지 나흘째인 16일 농심에 생긴 생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쑥대밭이 돼버린 들녘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비와 바람을 뿌린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점차 농사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참외 비닐하우스 농가 200여 가구가 밀집해 있는 경북 김천시 감문면 일대에는 200여동의 비닐하우스가 거의 완파된 것을 포함해 대부분의 비닐하우스가 손상돼 마을 전체가 폐비닐과 파이프 더미로 전락했다. 감문면 금곡리 윤병호 (49)이장은 "이 곳에는 아직도 한달 뒤까지 출하할 수 있는 참외가 많이 열리고 있었다"며 "손을 대려고 하니 엄두도 안나 밭으로 가면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게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설상가상(?)이라 할지 윤 이장은 이날 하필 보름전부터 예정된 동네 노인 40여명을 모시고 경주문화엑스포 관광 중이라 "귀가 후 쓰러진 비닐하우스를 걷어낼 생각만 하면 지금 관광이 마치 가시방석 같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고추 농가가 밀집한 경북 영양 지역은 올 한해 탄저병 등에 시달린 끝에 태풍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시름이 더욱 늘었다.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1천500여평 규모의 고추밭을 경작하고 있는 정대영(53)씨는 "병충해가 퍼지긴 했지만 그래도 올해는 고추 금(金)이 부쩍 올라 내심 기대했었는데 태풍으로 밭이 모조리 침수됐다"며 "대략 2천근 중 태풍전에 700여근밖에 수확을 못했으니 어림잡아도 1천200만원 가량은 손해를 봤을 것"이라며 낙담했다. 정씨는 그러나 "이 일대에는 크게는 5천-6천평 규모로 고추경작을 하는 농가가많다"며 "그런 집들에 비하면 그나마 손해가 덜한 게 아니겠느냐"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경북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일대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갖고 있다는 조철(60)씨는 복숭아밭 2만여평에서 아직 수확하지 않은 만생종이 모두 낙과하고 거봉 등 출하를 앞두고 있는 포도밭도 1천여평도 침수되고 나무가 쓰러졌다. 여기에다 100여평 규모로 3개동이나 되는 축사와 퇴비장의 지붕도 바람에 날아가자 조씨는 "이래저래 1천500-2천만원 가량은 피해를 보지 않았겠느냐"고 허탈해했다. 전국새농민회 경북지회 회장이기도 한 조씨는 "태풍은 매년 불어오고 강도는 더욱 거세지는 것 같다"며 "실의에 빠진 농민들을 위해서는 재해에 당국이 발 빠르게대처하되 보다 합리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농업경영인 경상북도연합회 홍보위원장인 장영락(44)씨의 하소연은 더욱 애절하다. 경북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에서 4천여평의 과수원을 경작하고 있는 장씨는 "쓰러진 배나무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과수원에 갔다가 상품으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배들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차라리 배밭을 불태워 버려리는 게 낫겠다 싶어그냥 되돌아 왔다"고 말했다. 장씨는 "좁은 땅 덩어리에서 1만여평의 땅을 가지고도 빚을 지고 사는데 정부나농협은 아무런 대책이 없다"며 "나 자신이 농업경영인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농사를권하고 싶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지만 이외에는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 장씨는 또 "태풍 '매미'의 여파는 자칫 당국에 대한 성난 농심으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며 "농업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대구=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msh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