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2월의 독립운동가로 북간도 지역에서 교육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군을 양성한 소래(笑來) 김중건(金中建.1889.12.6~1933.3.24) 선생을 30일 선정했다. 별호가 몰나(沒那), 불폐(不吠), 법명이 '마루진'인 그는 함남 영흥에서 태어나한학, 전통유학, 노장사상을 공부했으며 17세에 서당훈장을 지낼 정도로 문재(文才)를 자랑했다. 종교적 구도에 의한 사회개혁을 모색한 그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국민신보(討國民新報)'란 사설을 읽고 사회개혁을 위한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 서당을 연명학교로 개조해 어린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천도교 교리사업에 적극 가담하면서 일진회가 합방청원서를제출하자 '토일진회(討一進會)'란 주제의 논문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천도교를 통한 구국운동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1910년 낙향해 천기대경(天機大經)과 대종원부경(大宗元符經)을 완성한뒤 1913년 원종(元宗)을 창립했다. 선생은 `역사는 인격투쟁이어서 인물의 양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원종의교세를 확장하다 일본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자 1914년 북간도 훈춘으로 망명했다. 이어 북간도에 도전학원, 건원학원, 입포강 학원, 경신학원 등을 설립, 민족 교육 운동을 펼치는 한편 1920년 무장투쟁단체인 대진단(大震團)과 대한국민단을 결성했다. 1922년 독립군 관련 기밀문서가 발각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고향으로 축출된선생은 학원 설립을 통한 교육과 교세 확장에 힘쓰고 북간도의 교도들에게 북로군정서, 고려혁명의혈군 등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전개토록 지시했다. 그뒤 다시 북간도로 건너간 그는 신민부의 김좌진, 대종교의 윤세복 등을 만나독립투쟁의 단일 전선을 구축했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원종교도로 부대를결성해 길림구국군과 연합전선을 구축,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공적을기리는 전시회가 2월 한달간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열린다. (서울=연합뉴스) 이성섭 기자 lee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