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아이가 신던 신발이 아깝다고 깨끗이 빨아 두었다가 '나라도 신어야지' 하고 신발장에 넣어 둔 것들이 어느덧 신장 한 줄 빼곡하다. 아이의 빠른 성장에 작아진 그 신발은 이젠 남편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게 쑥쑥 자라는 신체만큼 그 정신은 따라가지 못하는지 아들은 10월만 되면,아니 좀 심하게 말하면 여름 방학만 끝나고 나면 곧바로 생일타령을 하고 다닌다. 나와 제 아빠를 세뇌라도 시키려는 듯. 처음엔 터무니없는 선물을 요구한다 싶다가도 한 두어 달 듣다보면 나와 남편은 서서히 녀석에게 너그러워지고 만다. 어느새 우린 아들의 세뇌작전에 함락당하고 만다. 그런데 올해는 왠지 생일타령이 사라졌다. 하나 이건 또 뭘까? 언제부턴가 내 맘속에는 나도 모를 섭섭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얼굴만 빠끔히 내밀며 일수쟁이처럼 눈도장을 찍는 싫지 않던 그 어리광. 끝나버렸나? 갈비뼈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아무튼 나의 이런 묘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받아놓은 혼삿날처럼 바삐 지나가고 드디어 녀석의 귀빠진 날 아침, 우린 다 함께 바쁘다는 현대인의 시간적 비애를 탓하며 미역국만 끓여서 가볍게 밥상을 차렸다. "저녁은 우리 근사하게 먹자." 나는 아이 눈치를 연신 살피며 필요 이상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들놈이 "미역국 참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저를 낳아 이렇게 잘 키워 주셔서요. 그리고 엄마, 아프지 마세요." 난 10월만 되면 아픈 것이 모두 아들 탓이라고 했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을 수도,녀석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식탁 앞에 산처럼 앉아있는, 그 덩치만큼 철이 들어버린 녀석을 눈물 너머로 바라보면서 내 집 가득한 가을 아침 햇살을 보았다. 그건 잘 익은 홍시 빛을 닮아 바라만 봐도 황홀한 햇살이었다. '내 기도의 반은 당신입니다./고른 숨결처럼 평온 하라고/그 나머지의 반도 당신입니다./햇살을 물고 있는 그 얼굴/그림자는 뒷걸음질치며 피해가라고' 언젠가 아들을 생각하며 써 보았던 시 한 구절처럼 아직은 아들도 내가 전부이기를 바라지만 녀석은 벌써 11월 바람이 되어 멀리 가고 있다. 내게서…. 그래, 그런 것일까? 세월도 아이처럼 총총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법을 배워간다. < bezzang081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