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단순히 '부르는 이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호칭을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규정지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생활에서 호칭은 곧 직급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니다. 직함을 잘못 불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만큼 호칭은 상하 수직관계가 뚜렷한 한국의 직장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직급을 아예 없애는 회사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이른바 '호칭 파괴'다. 차장 과장 부장 등 익숙한 직급을 과감히 폐지하고 직원들 간에는 이름 뒤에 '~님', '~씨'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수직적인 기업 문화를 수평적으로 바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호칭 파괴'를 앞장서 실시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주)태평양 김대호씨(35), 다음커뮤니케이션 정경균씨(31), (주)아모제 송혜경씨(28), 제일제당(CJ) 주재경씨(28)를 만나 호칭 파괴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한사코 자신들의 대외 직함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해 모두 '씨'로 표기한다. ----------------------------------------------------------------- 오랫동안 익숙해진 'OO부장님'이라는 명칭을 하루 아침에 'OO님'으로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다. 혹시 불이익이나 당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호칭 파괴에 따른 어색함은 잠시일 뿐 오히려 업무 효율이 높아지는 계기가 된다"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 (주)태평양에서 새로운 호칭 도입을 담당했던 김대호씨는 "'고스톱쳐서 딴 직함도 아니고 몇 십년을 쏟아부어 간신히 단 직함이다"며 버티는 윗분들 때문에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벌금함을 만들고 우수 사원 시상이라는 '당근'까지 제시하고서야 새로운 제도가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이제는 대부분 새 호칭에 익숙해졌다고 전했다. "한두달만 지나면 회식 때도 자연스레 '~님'이라는 말이 입에 익숙해지게 마련"(제일제당(CJ) 주재경씨)이고 "동료들의 직급 연차도 동시에 잊어버리게 돼 어려운 말도 쉽게 나온다"((주)아모제 송혜경씨)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수평적인 의사 소통이 한결 쉬워진다는 얘기다. 예컨대 회의 때도 예전같으면 팀장급이 나서 '무슨 할말 없나'고 말하면 쥐죽은듯 조용했지만 이제는 'OO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쉽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고 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톡톡 튀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견. 호칭 파괴 앞에선 사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정경균씨는 "전자결제할 때 e메일 서두에 '사장님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대신 '이재용님 안녕하세요'라고 쓴다"며 "벽이 허물어지니 의사결정도 빠른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주)태평양 서경배 사장도 조회 때 직원들이 '서경배 님께서 조회사를 말씀하시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름을 부르면서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 "'형수, 제수'라는 이름의 직원이 있어요. 이 사람들 이름 뒤에 '님'과 '씨'를 붙이니 '형수님', '제수씨'가 되는 거예요. 모두들 박장대소했죠." 김씨가 소개한 해프닝이다. 주씨는 "친할 땐 성에다 바로 님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보니 나는 '주님'이 됐다"며 웃었다. 그러나 호칭파괴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다. 온라인 세대인 젊은 직원들에겐 '~님'이라는 호칭 사용이 자연스럽지만 상하 조직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에게 새 호칭 사용은 부담스러운게 사실이다. 형식만 '~님'일뿐 굳어진 사고는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김씨는 "솔직히 임원들은 아직도 '~님'을 쓰는 것을 주저한다"고 털어놨다. 결국 직원들 사이의 세대차가 생길 수 있다. 사내에서 호칭 파괴가 정착됐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인 한계도 많다. 회사 바깥에는 수직적인 기업 문화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직위 확인을 일종의 '신원 조회'로 생각하는 관행 탓에 직위가 없으면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그렇다. "상대방이 직함을 물어오면 한참동안 호칭 파괴를 설명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고 송씨는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비록 사내에는 공식 직함이 없지만 대외업무를 하는 직원들의 명함엔 '대외용' 직함이 새겨져 있다. 참석자들은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호칭파괴 바람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정씨는 "10년 뒤엔 호칭 쓰는 회사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김씨도 "협력 업체에도 호칭 파괴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다"고 말했고 주씨 역시 "언젠가 직위가 아닌 직종만 명함에 남을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