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기의 레임 덕 탓일까,경제관료들이 힘을 못쓰고 있다. '개혁'과 '구조조정'의 기치 아래 은행을 한꺼번에 5개나 퇴출시키고,빅딜이란 이름 아래 간판급 제조업체들을 한두름에 엮어내던 호기(豪氣)가 4년도 채 안돼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달 30일 행정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하이닉스의 반란'. 하이닉스반도체를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에 매각한다는 양해각서(MOU)가 하이닉스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거부됐음에도 관련부처는 속수무책의 속앓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자존심? 이제 우리는 완전히 손 들었다. 채권단의 결정이 그동안 추진해온 구조조정 정책과 어긋나지 않는지 지켜볼 뿐"(금감위 실무자), "시장경제에서 채권단, 주주, 임직원 등 기업을 유지하는 주체끼리 이해관계가 다르니 상반된 결정을 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재경부 실무 관계자)…. 한결같이 맥빠진 반응뿐이다. 관료사회가 '하이닉스 쇼크'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인 지난 3일, 또 하나의 '망신살'이 관료들을 강타했다. 진앙지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전윤철 경제부총리와 나란히 앉아 공적자금 관련 의사결정을 주도할 민간측 공동위원장 선임을 놓고 또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재경부는 민간 위원장으로 이진설 서울산업대 총장을 내정, 민간위원들에게 '협조'를 신신당부했는데도 다른 인물이 전격 선출됐다. 정부의 금융 구조조정정책을 최종 추인하는 반민반관(半民半官)의 기관으로, 정부 입지도 잘 헤아려줘야 할 관변 기구가 반기를 든 것이어서 충격은 더욱 컸다. "법대로, 규정대로 하자는데 어떻게 하나?" '관치의 향수'가 없지 않다는 모 부처 중견과장의 푸념이다. 불과 3년반 전,공식적인 문건 없이도 부실금융회사들을 잇달아 퇴출시키던 무렵의 '잔뜩 힘 실린'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이런 징후는 지난 2,3월 조흥.외환은행장을 선임할 때부터 감지됐다. 금융당국이 내심 염두에 뒀던 인물은 모두 '낙하산'과 '관치' 시비로 일찌감치 후보군에서 밀렸다. 공무원이 아닌 금융감독원까지 덩달아 힘빠진 모습을 보인 사례였다. 공석이 생긴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 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통위원 임기가 2년이나 남아 있던 강영주 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선임된 뒤 재경부는 열흘 이상 후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재경부 추천권이 법규에 명시돼 있는데도 '관료출신 불가'라는 한은의 반대에 부딪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3홍(弘)스캔들'에 걸려 스타일이 완전히 구겨진 판에 일선 행정부처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라며 '최고 권부'를 탓하기도 했다. 눈치 빠른 일부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새 정부가 들어설 내년 이후를 대비해 좋은 아이디어를 챙겨두자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당분간은 전력투구하지 말고 '세월'에 맡겨두자"는 얘기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