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데는 침묵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무섭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신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합니다" 1950년 출간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소설 '생의 한 가운데'의 한 대목이다. 실존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개인이 삶의 주인임을 일깨우며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2년후 린저는 인류의 구원문제를 다룬 '다니엘라'로 다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그후 출간된 '덕성의 모험''미리암''아벨라르드의 사랑''검은 당나귀'등도 역작으로 평가되는 작품들이다. 매년 꾸준히 소설과 산문을 발표해 왔던 린저가 17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떴다. 그의 일생은 세월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독실한 가톨릭집안에서 태어난 린저는 소녀시절에는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고,뮌헨대학에 들어가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빠져 들었다. 한동안 교직에도 몸담았으나 문교당국과 갈등을 빚어 교직을 그만두고 문학을 시작하게 된다. 이 때 '파문'을 발표해 유명세를 탔으나,나치는 감상적인 작품을 용납할 수 없다며 판금조치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반나치주의자로 낙인 찍혀 러시아전선으로 끌려가 사망했고,자신도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린저는 당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옥중기'에서 토로했고,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84년 녹색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 반체제 작곡가였던 윤이상씨와 교분이 두터웠고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던 친북인사이기도 했다. 북한 방문기인 '또하나의 조국'은 80년대 국내 좌파지식인들과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북한을 범죄없는 천국이라고 묘사했던 그녀가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북자가 속출하는 오늘의 북한을 다시 간다면 뭐라고 말할 지. 작고소식을 들으며 문득 갖게 되는 의문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