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는 중국서 조선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조선말을 곧 잘 하지만 진옥이는 조선말을 잘 못합네다" 지난 97년 탈북한 함북 무산출신의 유동혁(45.치과의사)씨는 18일 오후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공항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안에서 아이들은 모르는 혼자만의 고민을 기자에게 털어놨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하나, 뭘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까.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꿈에도 그리던 한국땅이 다가오자 새로운 고민들이 떠올랐기 때문. "한국서 치과의사면 대우받을 수 있는 직업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혹시 북한에서도 잘 사셨던 것 아닙니까" 북한 사정을 잘 모르는 기자의 질문에 유씨는 치과의사 출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이빨을 드러내며 쓴웃음만 지었다. "거기서 치과의사가 어디 대접 받습네까. 약도 없고..." 무산에 두고온 70대 노부모도 갑자기 생각나는 듯 했다. "나이가 너무 많이 드셔서 같이 오지 못했습네다. 하지만 뭐 괜찮습네다" 최병섭(52.공장근로자. 함북 온성 출신)씨가 한국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도 "두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어눌한 말투로 힘들게 말을 이어가는 최씨나 부인 김용봉(49.점원)씨의 표정은 의외로 어두워 보이기조차 했다. 아이들 걱정에 한숨 짓기는 이 성(43.공장근로자.함북 회령 출신)씨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가장들이 데려온 아이들 교육 걱정에 마음이 무거운 반면 이씨는 북에 두고온 남매 걱정에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부인 김용희(40.여.창고서기)씨와 막내딸 진화(7)양만 데려왔을 뿐 17살과 12살 먹은 남매를 북에 두고 온 것. "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 않습네까. 통일되어야 볼 수 있겠죠" 반면 철모르는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가 하면 좌석에 붙어있는 TV 모니터를 만지작거리며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유씨가 걱정하는 아들 유 철(13)군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잘 모르겠지만 기분 좋습네다"라며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반면 2살 위인 누나 진옥(15)양만 해도 그동안 겪은 고생이 만만치 않았던듯 케이크를 먹다 갑자기 뜻모를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일(49.공장근로자.온성 출신)씨 아들 대성(16)군도 기자들의 질문에 피곤한듯 "저는 중국말은 조금 할 줄 알지만 조선말은 잘 모릅네다"라고 소리쳐 놓고서도막상 한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기쁨반 걱정반으로 맞이한 한국땅에서 이들을 처음 맞은 것은 한국 기자들의 열띤 취재 경쟁. 긴장한 어른들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동안 고아로 알려진 김 향(15)양은 한국에 오게 된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한국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김 양은 "꿈이 뭐냐"는 질문에 "어려울 때 도와주신 중국분들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고 싶다"고 당당히 말했다. 탈북자들은 주중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이래 마닐라를 거쳐 닷새만에 소망하던 한국 땅을 밟아 서울에서 첫 밤을 보내게 됐다. (영종도=연합뉴스) 이충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