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뢰가 '남은 자의 증후군'을 치유한다 ]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경제는 다양한 교훈을 체득할 수 있었다. 나라 경제가 대외적으로도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달았음은 물론 기업이 생존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구성원들이 얼마나 뼈저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온 국민이 절감했다. 대규모 고용조정에 따라 수십만명의 샐러리맨들이 한 순간에 직장을 잃고 길거리를 방황했다. 이같은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과잉인력 중복투자 부실은폐 등이 만연했다는 자성론이 고개를 들었고 기업들은 '상시 구조조정'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부작용 없는,효과적인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수석연구원은 "구조조정은 기업에 있어서 외과적 수술과 같은 것이다. 외과적 수술 자체는 사실 간단한 것이 많다. 뛰어난 의사가 환자의 수술 후유증이나 심리적 동요에 신경을 쓰듯 훌륭한 경영자는 구조조정 후 조직에 어떤 변화가 올지를 걱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은 자의 증후군'은 크고 작은 구조조정으로 동료들이 일터에서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아 있는 구성원들이 보이게 되는 대표적인 구조조정의 부작용이다. 조직이 동요하며 분위기가 위축된다. 실직의 위협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서 업무에 대한 책임감도 떨어진다. 실제로 남은 자의 증후군은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기업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심각한 병리 현상이기도 했다. 이같은 부작용을 예방하면서 순조롭게 구조조정을 하려면 평소 기업 내부의 신뢰 수준을 끌어올려 놓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국 그린리프센터의 최고경영자(CEO)면서 저명한 경영컨설턴트인 래리 스피어스 박사는 "경영자들은 만병통치약이나 즉효약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평상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튼튼한 조직을 갖추는 일이다. 기업 내부의 높은 신뢰 수준은 경기 침체기에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지난해 10여년 만에 찾아온 심각한 경기침체로 많은 기업들이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일하기 훌륭한 기업'으로 평가받은 포천 1백대 기업 중에서도 20% 정도는 감원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원을 하면서도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일하기 좋은 기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뢰의 토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정보통신업체인 시스코시스템즈는 지난해 5천명이 넘는 직원을 내보냈다. 그러나 직원들로부터 별다른 불평을 듣지 않았으며 곧바로 조직을 추슬러 경기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직접 포천 1백대 기업을 선정했던 경영컨설턴트 로버트 레버링은 "직원을 해고하면서도 신뢰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상시 직원들에 대한 배려와 이익의 분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시스코는 해고 대상자들이 사회봉사기관 근무를 선택할 경우 1년 동안 시스코에서 받던 봉급의 3분의 1을 지급했다. 물론 경기가 호전될 경우 해고자들은 당연히 '재(再)고용 0순위' 자격을 부여받았다. 시스코가 이런 방법을 즉흥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이 평상시 어떤 조직 문화를 갖고 있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력부문(HR) 담당자였던 바버라 벡은 '직장과 가정'에 대한 시스코의 기본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스코는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아이를 걱정하는 종업원들을 위해 탁아시설을 제공했고 퇴근하면서 미진한 업무에 신경을 쓰는 종업원들을 위해서는 각 가정에 초고속 통신망을 깔아줬다. '직장과 가정의 통합'은 결코 개념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배양된 신뢰의 토대가 불황에 따른 불가피한 해고 이후에도 불평을 듣지 않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제약회사인 파이저의 구내 식당도 미국내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아침식사는 물론 집에 가서 저녁식사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종업원들을 위해 퇴근시 가족용 저녁 식사를 포장 주문할 수도 있다. CEO, 말단 사원 구분없이 줄을 서서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건축물의 냉난방 등 공조시스템을 공급 설치해 주는 TD인더스트리는 이미 수년째 포천 1백대 기업중 열손가락안에 들었던 대표적인 신뢰경영 기업이다. 종업원들은 모두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CEO라고 해도 한 평의 사무공간 이외에 별다른 특혜가 없다. 지정된 주차공간도 없으며 전화를 받아주는 비서도 없다. '기업 민주주의'란 공통의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셈이다. 이들 기업이 보여주는 하나 하나의 행동들은 평상시 내부 신뢰 수준을 끌어올리는 초석이 된다. 신뢰는 공든 탑이다. 결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지만 불황을 극복하고 구조조정의 후유증을 예방하는 데는 공들여 탑을 쌓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 산업부 대기업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