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포도밭으로 오세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포도 송이를 어루만지며 시를 쓰는 남자. '포도밭 시인 류기봉(36)씨는 이곳에서 10년째 포도농사와 시농사를 함께 짓고 있다. 광릉 수목원에서 차로 5분쯤 걸리는 류기봉 포도밭(031-572-2859). 여름 내내 햇볕에 그을린 시인의 눈빛이 환하다. 그의 어깨 뒤에서 포도나무 잎들이 일제히 손을 흔든다. 늦걷이 가을포도 몇송이도 햇살을 튕긴다. 올해는 포도가 잘 됐다. 그러나 외국산 수입포도가 흘러넘쳐 값은 영 별로였다. 더구나 그는 자연농법만 고집한다. 6년전 생태농법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부터 농약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당귀나 계피 감초를 구해다 포도밭에 '보약'을 주고 꽃이 필 무렵에는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오늘은/나무가 우울하다 나도 어깨가 무겁다/꽃이 잘 피어야 하는데,/나는 힘찬 행진곡풍의 클래식을 들려준다./줄기의 손도 잡아주고 스텝도 밟는다./줄기의 어깨가 들썩인다'('그린농법'부분) 그렇게 나무줄기와 잎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는 밤마다 포도밭 이랑에 자리를 깔고 시를 쓴다. '포도알에서 토끼의 귀가 자라고 있습니다./달이 움직일 때마다 포도잎을 흔들고/꿈틀꿈틀 기어나온 밤벌레의 소리일까/(중략)/보름달이 귓속으로 밀고 들어갑니다./달빛 밝은 환한 청각 신경/장현리의 포도밭에서 칠십 리 길 떨어진 청량리/청과물시장 바닥에/귀를 활짝 열어 놓습니다'('나의 포도 캐릭터'부분) 청과물 시장으로 팔려가는 포도는 이곳의 환한 달빛을 도시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 빛무리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시학을 꿈꾸는 시인. 프랑스에서는 자기 포도밭에다 그림도 걸어 놓고 음악회와 연극공연도 하고 시낭송도 한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래서 지난해부터 포도꽃 잔치를 벌였다. 포도즙과 포도주를 마시며 원로 시인 김춘수씨의 축시 낭송에 시화전까지 곁들였다. 포도나무 '분양'도 한다. 가족별로 한 그루씩 맡아 주말마다 돌보고 수확기에는 직접 포도를 따는 것이다. 시인 조정권씨와 이문재씨 가족도 한 그루씩 분양받았다. "좋은 포도나무는 꽃을 보면 알수 있어요.꽃이 충실하고 꽃술이 잘 나와야 포도가 많이 열리지요.한 그루에 70∼1백송이 정도 열리는데 4㎏짜리로 10상자쯤 땁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열매도 그렇다. 뿌리가 튼실하고 꽃이 좋아야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법. 그의 포도밭에 들어서면 오래 묵은 거름처럼 울림이 깊은 시편들이 곳곳에서 솟는다. 그는 한국성서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포도밭 5천평을 가꾸면서 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지난해에 펴낸 첫시집 제목도 '장현리 포도밭'(문학세계사)이라고 붙였다. "포도는 잎과 줄기가 다 나오고 가지가 제 자리를 잡은 후에야 꽃이 핍니다.잎과 줄기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순수한 살갗 냄새,이성의 그리움을 향기 속에 품고 있지요" 그 꽃이 진 자리마다 눈물처럼 박히는 것이 바로 포도알이라고 일러주며 손그늘로 석양빛을 가리는 시인의 얼굴이 포도주처럼 바알갛다. 남양주=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