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엔이 정한 '문명간 대화의 해'이다.하지만 이런 구호는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 테러가 터지고, 미국 정부와 언론이 한 목소리로 그 배후를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지목하면서 허울뿐인 구호로 전락해 가고있다. 미국은 배후가 밝혀지기만 하면 예고도 없이 그 국가를 무차별 폭격하겠다는 태세이고 미국 언론 또한 이번 사태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안중에도 없이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요즘 미국의 언론보도를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 치하 어용 한국언론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우리 언론이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면서 반체제 인사때려잡기를 선동했듯이 미국 언론 또한 미국과 인류의 적을 때려잡으라고 외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번 테러사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발표되지 않았음에도 미국언론이 앞장서서 그 배후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중인 것으로 알려진 반미 이슬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것은 물론, 이번 사건을 새뮤얼 헌팅턴이 제창했다는 '문명간의 대결'로 몰아 가고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문명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 중심의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말한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자기네들이 인류의 주인이며 인류와 자유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미국중심 서구 기독교사회에서 이슬람은 결코 문명(civilization)이 아니며정복하고 교화하며 순치해야 할 대상인 야만(savagery)이라는 사실이다. 비유컨대이슬람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어 식민지 조선과 같은 목적물이다. 이런 시각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자유가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비겁한 테러를 저지른자를 반드시 찾아 처벌해 자유를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정부나 언론이 추정하는 것처럼 이번 테러사건의 배후가 정말로 이슬람으로밝혀진다면 그 순간부터 이슬람 사회는 "자유를 공격한 비자유의 사회", 즉 야만이되는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마침 다른 이슬람 연구자 5명과 함께 「이슬람문명 올바로 이해하기」라는 단행본을 엮어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이슬람에 대한 많은 편견과 오류가 우리의 정상적인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수와 같은 국내 전문가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슬람하면 어쩐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든 호전적인 광신도 집단이나 테러리스트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책 집필자들은 이슬람을 가장 오도하고 있는 게 바로 '칼과 코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말은 이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슬람 전파가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이기는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의 어떠한 흔적도코란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떻든 피랍 민항기를 이용한 사상 초유의 가미카제식 이번 테러사건의 배후로이슬람이 지목되면서 유엔이 제창한 '문명간 대화의 해'는 허수아비가 됐다. 그런데 아주 우스꽝스런 현상은 국내 언론의 시각이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만해도 일부 언론은 유엔 정신에 발맞춰 각종 이슬람 특집을 마련하면서 "이슬람을 새로 보자", 즉 이슬람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우리의 이웃으로 보자고 제창했다. 국내 언론은 그러나 이번 사건이 터지자마자 미국 언론에 못지 않은 강도로 '이슬람은 야만'이라는 시각으로 돌변, 이슬람 때리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국내 역사학자는 "설사 이번 테러사건 배후가 빈 라덴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이슬람의 야만성은 아니며, 아울러 그에 대한 미국의 응징 보복전의 정당성을 담보해 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사건을 초래한 가장 큰 책임은 부시 행정부의 힘에 의한 세계화 전략임에도 미국 언론조차 이에 대한 비판없이 자유와 인권의 표상인 서구문명과 야만성으로 무장한 이슬람 사회간 대결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국내 언론이 이런 미국측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