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프랑스에서는 때 아닌 시의 부활로 호들갑스럽다.

초현실주의 이래 시는 사실상 죽어 있었다.

몇 사람의 대가들이 시의 영광을 증거했고,몇몇의 고집스러운 이론가들이 시의 목숨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지만,독자들은 시로부터 썰물처럼 떠나 버렸다.

시의 영역은 폐허이고 사막이었다.

현대의 서양 시인들이 폐허에서 살아남기를 한결같은 주제로 삼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시의 내용도 형식도 더 적막해졌다.

독자들은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이 거리에 들어설 마음이 더욱 없어졌다.

시는 점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돼 갔다.

그런데,문득 시가 돌아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파발마처럼 시의 부활을 알리는 전령들이 스스로 시의 자태를 하고 몰려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시 독자의 부활,그리고 시를 즐기는 풍속의 부활이었다.

발단은 지난 99년 교육부 장관 자크 랑(Jacques Lang)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시인들의 봄''이라는 기발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3~4월 중 공공기관 시인 시민들이 두루 참여하는 시의 축제를 벌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첫 해에 2천5백건의 행사 및 출판이 성사됐고,이듬해에는 5천건,그리고 올해에는 무려 세배를 넘는 대략 8천건의 행사가 벌어졌다.

3월26일부터 4월1일까지 거행된 ''2001년 시인의 봄''을 주관한 엠마뉴엘 우그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즉 대중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작년에 미셀 드기가 싸구려 의사소통의 이데올로기에 가차없이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건 것으로부터 1백80도 선회한 태도였다.

우그는 ''시인들의 봄''을 파리와 몇몇 대도시의 축제가 아니라 프랑스 전 지역의 축제로 기획했다.

그의 제창에 교육부 문화부를 중심으로 한 공공기관들이 다투어 시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전국 도서 기구는 조직위원회에 1백60만프랑의 기금을 출연했고,''라디오 프랑스''와 ''프랑스 텔레비전''은 시에 노래를 붙여 방송했으며,국영철도회사는 차표의 뒷면에 시를 인쇄했다.

산업사회가 발달할수록 시가 외면당한다는 명제는 이론적으로 논증되기에 앞서 경험적으로 증명되는 현상이다.

잡다한 일상사를 요령있게 요리하는 소설과 달리 그 본성상 고고한 진리의 핵심 언저리를 선회하는 시가 이 세속도시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단체 문인 시민들이 힘을 모아 죽어가는 시를 되살려 놓은 것이다.

왜?

두말할 것도 없이,세속도시의 사람들도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을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계산이 지배하는 이리들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삶의 허망함과 참된 진리의 결핍에 문득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의 봄''이 주는 교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시민에 봉사하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이 행사처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가?

본래 시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아낌을 받는 문학 장르였다.

누구나 시를 썼고 누구나 시를 읽었다.

저 참혹한 80년대에도 시는 위축되기는 커녕 거꾸로 맹렬히 불타올랐다.

그런데,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도 시가 퇴조하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임종의 상황에 다다랐다.

지금 서점에는 몇몇 싸구려 감상시들을 제외하고는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으며 유수한 출판사들에서도 시집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도 정통 산업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그보다 심각한 원인이 있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상업적 이윤추구를 진리추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정부가 앞장서서 조성했다는 것 말이다.

물론 국가 간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정책담당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정부는 공적 책임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

시의 죽음이 공적 책임에 해당한다고 말하면 코웃음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눈앞에 뻔히 보이는 교육의 붕괴가 공적 책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뻗대지는 못할 것이다.

한데,교육의 부활과 언어의 회복은 아주 긴밀히 연결돼 있는가,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