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캠퍼스 풍경이 바뀌고 있다.

"교수 사장님"과 "학생 사장님"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호서대 생명과학부의 최옥병 교수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지난 9월 법인으로 전환한 호서생명과학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기능성
향을 뿜어내는 신제품을 개발하랴, 강의하랴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요즘은 방학이라 그나마 나은 편이다.

독일에서 13년간 유학할 때 배운 향 기술을 토대로 살을 빼거나 생리통을
덜어주는 등의 기능성 향제품을 상용화했다.

최근엔 식품에 첨가할 향제품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광운대 건축공학과 신유진 교수는 사이버공간의 건축설계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지난 7월 창업한 ''다른생각 다른세상''은 인터넷에 3차원 가상도시를
건설, 운영중이다.

창업이 공대교수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중앙대 경영학부의 오규택 교수는 파생상품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채권유통
시장의 DB를 구축하는 한국채권연구원을 경영하고 있다.

<> 벤처정책에 힘입어 캠퍼스 창업열풍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교수가
대표로 창업한 기업은 지난 8월말 40개사에서 최근 1백1개사로 급증했다.

교수가 임직원으로 참여하고 학생들이 직접 창업한 기업을 합치면 캠퍼스
벤처는 2백개사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과학기술원 창업지원센터에 입주한 에이스엔지니어링의 오석중 사장은
환경공학과 박사과정 3년차다.

문승현 교수의 지도를 받아 창업한 이 회사는 식품과 생명산업 공정에서
폐수 발생을 차단하는 통합청정기술을 개발, 상용화에 나서고 있다.

캠퍼스 벤처열풍에는 정부의 육성책 역할이 컸다.

올들어 실험실공장 설립을 허용하고 교수가 임.직원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한 정부의 조치가 대표적이다.

기술력있는 예비창업자는 자본금 2천만원만 있어도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것도 자본력이 취약한 캠퍼스 벤처 창업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벤처육성에 발벗고 나서는 대학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호서대는 내년에 국내 처음으로 벤처전문대학원을 운영하는 등 벤처 명문대
로 자리잡고 있다.

<> 코스닥 등록을 꿈꾼다 =새롬기술 다음커뮤니케이션처럼 코스닥시장에서
"황제주"로 등극한 성공벤처의 잇단 등장도 캠퍼스의 벤처붐에 기름을
부었다.

일신창투 고정석 사장은 "실리콘밸리에서 왜 벤처기업을 하냐고 물어보면
나스닥 때문이라고 합니다. 꿈이 거기에 있다는 얘기입니다"라고 말한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취업상담을 위해 찾던 교수실이 이제는 창업상담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기계오차를 정밀 진단하는 측정 시스템을 상용화하기 위해 98년초 SNU
프리시전을 창업한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희재 교수는 창업전도사로도
활약한다.

그의 연구실은 창업상담하러 오는 학생들 때문에 북적거리는 때가 많다.

<> 벤처밸리로 바뀌는 고시촌 =고시 망국론까지 낳으면서 대학가에 형성
됐던 고시촌은 이제는 캠퍼스 벤처가 모여드는 벤처밸리로 서서히 탈바꿈
하고 있다.

정부도 대학가 주변을 벤처밸리로 가꾼다는 구상이다.

암울했던 시대 저항정신의 무대였던 동아리 사회도 벤처열풍의 영향권에는
비껴 나지 못했다.

창업동아리가 봇물 터지듯 생겨나고 있다.

전국규모의 창업동아리 연합체인 한국대학생벤처창업연구회(KVC)의 회원
동아리만도 98년말 25개에서 40여개로 늘었다.

호서대에만 창업동아리가 42개에 이른다.

창업아이디어를 놓고 자웅을 겨루는 창업경연대회는 이제 대학가의 주요
행사가 됐다.

캠퍼스 벤처열풍은 누그러지지 않을 전망이다.

실험실 벤처에 대한 정부지원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박사과정 연구원이 실험실 창업기업에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병역특례 관련 규정이 개정돼 내년 8월 특례기관 지정신청때부터 적용된다.

대학평가때 교수의 창업(지원) 실적을 반영하는 방안도 내년에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 벤처열풍은 21세기 한국 대학의 가야할 길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험실에서 잠자고 있던 기술을 현장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의 두뇌들이 몰려있는 대학이 기술창업의 진원지가 되는 것이다.

<> 문제점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창업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강광남 원장은 "대학이 지나치게 비즈니스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강 원장은 "멀리 내다보고 원천기술을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조성있는 유망한 젊은 인력을 키우는게 과제"라고
지적했다.

학문하는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지나친 아카데미즘도 문제지만 과도한 현장중심이 대학가를 휩쓰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교수가 벤처기업 경영을 하느라 빠지는 수업일수가 잦아지면서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학생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 당장의 비즈니스가 되는지를 잣대로 삼는
현실도 옳지만은 않다는 지적이다.

창업을 위해 연구부담이 적은 대학원을 찾아 진학하는 학생들이 생겨나는
현실이다.

실험실이 벤처기업으로 바뀐 뒤에도 사제지간의 관계가 지속돼 적절한
성과배분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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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 대학 사례 ]

캠퍼스 창업붐의 부작용이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현장 중심으로 돌아선 선진국의 대학들도 비즈니스와 학문 사이에서
고민중이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벤처기업들은 대학의 시험철이 되면 사무실이 텅텅
비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곤 한다.

직원의 상당수가 하버드와 MIT 등 인근 대학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도쿄대의 기시 데루오 교수는 "과거 과학기술로 이름을 날렸던 동독의
일부 대학 인근지역이 폐허처럼 변해 슬픔을 느꼈다"며 돈을 따라 교수
학생들이 서독으로 간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비즈니스와 학문 사이의 줄타기는 어쩌면 기술이 경제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모든 대학이 겪어야 할 운명일 수 있다.

"자본과 학문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야 새천년 일류대학이 될 것이다.

< 오광진 기자 kjo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