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어느 가상도시의 음침하고 으스스한 오피스텔 공간.

애꾸는 뱀파이어가 시체를 눕혀 놓고 인간통조림을 만들고 있다.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고 뿌연 연기가 올라온다.

뱀파이어가 무시무시한 전기칼을 들고 시체의 배를 가르는 순간.

"컷! 아무래도 좀더 두꺼운 칼날을 써야할까봐"

감독의 이 한마디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경기도 양수리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장의 제7촬영소.

세계 두번째 인터넷 전용 인터랙티브(interactive) 영화 "뱀파이어 블루"의
촬영이 한창이다.

촬영현장에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참견(?)하는
한 젊은 여성이 있다.

조영호(27)씨.

세계 최초의 인터랙티브 인터넷영화인 "영호프의 첫째날"을 탄생시킨
영화감독이다.

"인터랙티브 무비"는 관객이 영화속 인물과 행동,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전혀 다른 줄거리와 결론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단지 보여지는 극영화와는 달리 관객이 직접 참여해 내용을 정하는 "열린
영화"다.

이같은 인터랙티브 무비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제시했던 익숙한 개념이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문화산업이 갖춰야 할 가장 큰 트렌드로 소비자의 욕구가
직접 반영되는 "양방향성"이 꼽히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누가 먼저 "상상의 세계"를 구체화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그 새로운 지평을 한국의 젊은 여성감독이 연 것이다.

"영호프의 첫째날"은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영화 "슬라이딩 도어스"나
예전에 인기를 모았던 TV코미디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중요한 고비마다
두 가지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한다.

관객은 세차례의 선택을 통해 모두 8가지의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다.

영화는 영화감독 지망생의 좌절과 방황을 두 여자친구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표현한다.

이는 조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서울예전 연극과 출신인 조 감독은 중학교
때부터 지독한 연극광이었다.

극단 "전설"에 있을 때 유인택 박광수 문성근 등 영화계 인사들을 만나면서
영화에 눈뜨기 시작했다.

특히 독립영화 제작현장에 배어 있는 젊은이들의 땀냄새에 매료됐다.

당장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생각해 둔 2편의 영화를 제작하다가 자본 조달에 실패해 연거푸 중도
하차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4월 한글과컴퓨터의 전하진 사장을 만나게 된 것.

배급망을 찾지 못한 독립영화들이 인터넷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던 때였다.

조 감독은 다짜고짜 물었다.

"단편을 만들면 한컴에서 배급해 줄 수 있나요"

"무조건 올려줄테니 뭐든 가지고 와요"

전 사장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인터넷을 통해 상영되는 영화라면 그 매체의 특성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선택을 주제로 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죠.
제작 방향은 당연히 인터랙티브에 맞춰졌죠"

두달여의 고된 작업끝에 편당 10분, 총 러닝타임 40분짜리 "영호프의
첫째날"이 완성됐다.

지난 6월26일 한컴사이트에 마련된 "네오타이밍"에서 개봉된지 한달만에
30만 이상의 접속건수를 기록했다.

전송속도 등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는
불만도 많았지만 인터랙티브 무비의 사업적 성공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여기저기서 투자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 감독은 무한기술투자 코아링크 바로비젼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인터랙티브 영화사인 "네오무비"(www.neomovie.com)를 설립했다.

그녀의 든든한 파트너인 오빠 조승현(28)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네오무비는 지금 무한기술투자로부터 지원받아 인터랙티브 영화인
"뱀파이어 블루"를 제작중이다.

내년에는 "열한 권의 일기장"을 만든다.

이들 영화는 네오무비 사이트를 통해 개봉되며 CD로도 선보일 계획이다.

조 감독은 전혀 새로운 분야인 만큼 어느 정도 시행착오는 각오하고 있으며
다양한 실험과 개발을 통해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에 맞는 영화 형식을
완성해 나가겠다고 말한다.

"인터넷이란 배급망은 세계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전세계
네티즌들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인터랙티브 영화를 만들어 세계시장에
진출하겠습니다"

21세기 한국 문화산업과 디지털영화의 프런티어인 조영호 감독의 당찬
포부다.

< 송태형 기자 toughlb@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