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선 < 연세대 교수 / 경제학 >

IMF 경제위기는 왜 왔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양하지만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환율문제다.

경상수지가 크게 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화가치가 과대평가돼 국제수지는
더욱 적자를 이루었다.

왜 원화가치가 과대평가됐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정치적 요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억지로 원화가치를 과대평가해서라
도 물가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비록 확인할 길은 없지만 과대평가된 원화를 통해 정치적 캐치 프레이즈였던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수 있다.

결국 우리는 경제위기의 근원이 바로 정치에 있었음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정치인인 김대중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우리 경제의 청사진을 보여 주었다.

국민들로 하여금 번영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 만큼
김 대통령의 경축사에 담겨진 이상과 목표가 모두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국민들에게 희망을 줌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 한 결과가 오히려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는 엄연한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이 경축사에 담겨진 내용을 무조건 희망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몇 개월 후에 총선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경축사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이 재벌개혁과 국민복지향상의 문제이다.

야당의 지도자가 김 대통령의 재벌해체정책에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복지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이 두 문제는 정치적
으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김대중 정권이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또 다른 경제위기를 몰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두 문제는 김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바대로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조화를 통해 풀어가야만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란 다음의 큰 두가지 관점으로 정리될수 있다.

하나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규정된 공평한 법질서가 재산권을 엄정히 보호해
줌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이 효율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하게 된다는 점이고 둘은
혹시나 시장경제의 경쟁에 의해 과도한 불평등이 유발되거나 일부계층의
복지가 염려될 때 민주적 의사결정에 의해 적절한 평등을 추구하자는 점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관점에서 모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조화에 실패해온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 세력을 업은 관치금융은 시장경제를 교란했다.

정보의 독점,비민주적 정치세력의 비호 등으로 정부와 금융이 도덕적 해이를
보였다.

이는 결국 경제의 비효율을 초래해 급기야 경제위기를 맞게 한 것이다.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진정한 민주주의에 의한 극빈자들의 복지 향상보다
는 힘의 논리에 근거한 이해집단들의 기득권 추구가 지배적 현상을 이루어
왔다.

이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당국자들에게 바라기는 재벌해체라는
정치적 슬로건에 집착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미 한국의 제도적 환경에 진화론적으로 형성된 재벌을 인위적으로
해체하기보다는 재벌의 조직과 행태를 또다시 진화론적으로 변화시킬 법과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금융 본연의 권한과 임무를 구축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일정 한도의 부채
비율을 넘지 못하게 하며, 재벌내의 상호지급보증을 금지시키며, 결합재무
제표를 작성하게 하는 등의 규칙으로 대기업의 행태변화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

정책당국의 권위주의적 형태를 그대로 둔 채 인위적으로 재벌해체만을
단행할 경우 기업은 또다른 기형적 모습으로 진화할 뿐 진정한 재벌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복지정책에도 마찬가지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저소득층에 대한 과도한 소득재분배 정책은 단기적인 정치적 인기를
위해서는 유용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곧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를 야기해 오히려 전국민의 경제적 능력을
저하시킬 것이다.

따라서 저소득층에 일할 기회를 주며, 또 아울러 열심히 일하게 하는
유인책을 마련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재벌정책과 복지정책도 기로에 서있다.

이 정책들이 단기적 정치목적으로 사용된다면 국민경제에 유익하지 못할
것임은 물론이고 이 정권에 정치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임을
지적해 두고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