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59) '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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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경제협력 추진 ]
우에무라 한국방문사절단일행은 귀국 뒤 약속대로 한.일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적극 나선다.
이들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일본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이들은 특히 불행한 역사에서 비롯된 한국민의 대일 악감정에도 신경썼다.
이런 이유로 일본 게이단렌은 한.일 협력관계에 직접 나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일.한경제협회"라는 단체를 별도로 조직했다.
회장은 우에무라 게이단렌 상근부회장-.
"일.한경제협회"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었지만 게이단렌과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이 협회에는 재일교포 경제인도 회원으로 참여시켜 부회장에 이강우
안도호로구 사장 등을 선임했다.
이사로는 종합상사와 기계 전기 엔지니어링 등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기업
대표들이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사무국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핵심참모였던 야마구치 전무
등을 임명했다.
한국 경제계는 일본의 이같은 조직적 대한 접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민했다.
경제인협회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는 61년3월24일 장면 총리와 가진
정책협의에서 한.일문제는 "협의회"가 맡기로 합의했다.
당시 "대외문제"에 관심과 준비를 갖춘 경제단체는 경제인협회정도였다.
앞으로 한.일 국교수립 과정에서 경제인협회가 반대 여론의 표적이 될 수도
있지만 양국간 경제협력을 정면 돌파하자는 게 경제계의 지배적 의견이었다.
경제인협회 초청으로 62년12월10일 안도호로구 시찰단 25명이 내한했다.
또 63년10월5일 안자이마사오 단장 등 일본 재계 중진 30여명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조만간 한.일 국교는 정상화돼야 하고, 경제계는 여건조성에 적극 나서야
했다.
또 일본이 61년부터 추진한 "소득배증 계획"의 성공요인을 파악해 우리 경제
계획에 반영할 책무가 있었다.
일본은 당시 연 10%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1차 5개년계획 목표성장률을 7.1%로 상향조정한 것도 일본 소득배증
계획의 목표 성장률 7.2%에 자극 받은 것이었음)
특히 45년 종전 후 만성 외화부족에 시달린 일본이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
했는지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일본 경제인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경제인과
우리 사무국 직원에게 설명했다.
일본은 시찰단을 파견하면서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선 시찰단 구성에 종합상사와 기계를 비롯 전기 조선 건설 엔지니어링을
참가시켰다.
또 중소기업까지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및 기술전문가 등도 동행했다.
한국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필자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 쓰시마 사절단이 조선 구석 구석을
살폈다는 지난 일이 생각나 찜찜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안도호로구 일본 오노다 시멘트 사장을 첫 번째 방한 단장으로 한 것도
여러가지 고려가 있는 듯하다.
안도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한,친한인사다.
그는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찾아 팔도강산 구석구석을 답사했다.
동양, 쌍용시멘트 사장을 지낸 안기동 박사도 안도선생의 협력을 많이
받았노라고 최근 필자에게 말했다.
특히 안도 사장은 안중근의사의 숭배자로 후원회 회장, 전기 출판도 도왔다.
그는 생전에 필자에게 이런 비화를 말한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대단한 분입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 순간,
경비대원에게 권총을 내주면서 이 권총에는 아직 세발의 총탄이 남아있으니
조심해서 취급하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시찰단과 두차례 접촉한 뒤, 필자는 이제 일본과 상설
"한.일경제협력위원회"를 조직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다음 회의에 정식
제안키로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9일자 ).
우에무라 한국방문사절단일행은 귀국 뒤 약속대로 한.일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적극 나선다.
이들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일본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이들은 특히 불행한 역사에서 비롯된 한국민의 대일 악감정에도 신경썼다.
이런 이유로 일본 게이단렌은 한.일 협력관계에 직접 나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일.한경제협회"라는 단체를 별도로 조직했다.
회장은 우에무라 게이단렌 상근부회장-.
"일.한경제협회"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었지만 게이단렌과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이 협회에는 재일교포 경제인도 회원으로 참여시켜 부회장에 이강우
안도호로구 사장 등을 선임했다.
이사로는 종합상사와 기계 전기 엔지니어링 등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기업
대표들이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사무국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핵심참모였던 야마구치 전무
등을 임명했다.
한국 경제계는 일본의 이같은 조직적 대한 접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민했다.
경제인협회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는 61년3월24일 장면 총리와 가진
정책협의에서 한.일문제는 "협의회"가 맡기로 합의했다.
당시 "대외문제"에 관심과 준비를 갖춘 경제단체는 경제인협회정도였다.
앞으로 한.일 국교수립 과정에서 경제인협회가 반대 여론의 표적이 될 수도
있지만 양국간 경제협력을 정면 돌파하자는 게 경제계의 지배적 의견이었다.
경제인협회 초청으로 62년12월10일 안도호로구 시찰단 25명이 내한했다.
또 63년10월5일 안자이마사오 단장 등 일본 재계 중진 30여명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조만간 한.일 국교는 정상화돼야 하고, 경제계는 여건조성에 적극 나서야
했다.
또 일본이 61년부터 추진한 "소득배증 계획"의 성공요인을 파악해 우리 경제
계획에 반영할 책무가 있었다.
일본은 당시 연 10%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1차 5개년계획 목표성장률을 7.1%로 상향조정한 것도 일본 소득배증
계획의 목표 성장률 7.2%에 자극 받은 것이었음)
특히 45년 종전 후 만성 외화부족에 시달린 일본이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
했는지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일본 경제인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경제인과
우리 사무국 직원에게 설명했다.
일본은 시찰단을 파견하면서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선 시찰단 구성에 종합상사와 기계를 비롯 전기 조선 건설 엔지니어링을
참가시켰다.
또 중소기업까지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및 기술전문가 등도 동행했다.
한국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필자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 쓰시마 사절단이 조선 구석 구석을
살폈다는 지난 일이 생각나 찜찜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안도호로구 일본 오노다 시멘트 사장을 첫 번째 방한 단장으로 한 것도
여러가지 고려가 있는 듯하다.
안도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한,친한인사다.
그는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찾아 팔도강산 구석구석을 답사했다.
동양, 쌍용시멘트 사장을 지낸 안기동 박사도 안도선생의 협력을 많이
받았노라고 최근 필자에게 말했다.
특히 안도 사장은 안중근의사의 숭배자로 후원회 회장, 전기 출판도 도왔다.
그는 생전에 필자에게 이런 비화를 말한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대단한 분입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 순간,
경비대원에게 권총을 내주면서 이 권총에는 아직 세발의 총탄이 남아있으니
조심해서 취급하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시찰단과 두차례 접촉한 뒤, 필자는 이제 일본과 상설
"한.일경제협력위원회"를 조직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다음 회의에 정식
제안키로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