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 연세대 교수 / 경제학 >

흔히 한국경제를 넛크래커(nutcracker)에 끼인 호두 같은 처지라고 한다.

개도국이 저기술 부문에서 추격해 오고 있는 반면 고기술 부문에서 선진국과
경쟁할 만한 힘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97년 위기 발생과 때 맞추어 권위를 자랑하는 "부즈 앨런&해밀턴 한국
보고서"도 이런 진단을 하였다.

넛크래커에 끼인 호두가 깨어지듯이 한국경제가 붕괴한 것이 현재의 위기
아닌가.

그러나 경제원론을 배운 사람이라면 한국만이 넛크래커에 끼인 호두 신세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세계에서 가장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와 가장 단순노동력만 가진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런 처지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어느 나라가 깨지는 호두 신세로 몰리는 것일까.

주로 그 나라의 요소비용과 생산성 사이의 관계를 환율이 얼마만큼 잘
반영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한국이 현위기를 맞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위기가 발생하기 전 몇년간 환율이
"고비용-저효율"이라고 불리었던 현상을 반영하지 못할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94년 1.4분기부터 97년 3.4분기까지 4백75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었다.

환율이 이렇게 낮게 유지된 데는 외자유입이 큰 역할을 하였다.

위기 발생 전까지 한국 기업은 금리가 싼 맛에, 금융기관은 돈놀이 맛에
외자를 도입하였다.

외국 금융기관은 고비용-저효율에도 불구, 한국 경제의 기초여건이
튼튼하다고 보고 또는 결국 한국 정부가 책임져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국에 투자하였다.

한국 정부는 정부대로 세계화를 추진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다고
자본시장을 개방하였다.

지금 위기가 이만큼 진정된 것은 무엇보다 작년에 낸 경상수지 흑자 4백여억
달러와 올해도 지속되고 있는 큰 폭의 흑자 덕분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해소됨과
동시에 환율이 대폭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환율 하락은 문제가 있다.

임금 금리 땅값 등 요소비용은 반등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외자가 흘러
들어옴에 따라 환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연초에 예상했던 올해 경상수지 흑자 2백50억달러도 2백억달러로 낮추었지만
이것이 달성될지 의심스럽다.

현상황은 적어도 조금은 위기 발생 전 상황을 닮아가고 있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환율을 조정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고 외채를 조기상환하는 등 주로 달러
수요를 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넘치는 달러공급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환율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외자유입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기외자 유입은 경계해야 하지만 장기외자유입은 얼마든지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둘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장기외자 유입도
환율을 낮추어 경상수지를 압박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앞으로 환란 재발을 막는 데도 외자의 구성에 신경쓰기에 앞서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작년같이 비정상적인 상황과 비교하여 경상수지가 악화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자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좀더 장기적으로 환란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경상수지
흑자 정착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지난 30여년간 "동아시아의 기적" 아래에서 일본 대만 중국 등 동북아국이
모두 경상수지 흑자국인데 한국만이 만성적 적자국이었다.

그 결과 현재 "동아시아의 위기"하에서 한국은 동남아국과 같은 반열에서
IMF구제금융을 받고 있다.

과거에도 한국이 경상수지 적자국 처지를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80년대말 엔고 상황에서 기회가 주어졌지만 "환율 조작국"이라는 미국의
비난 앞에 다른 나라보다 앞서서 환율을 반락시킨 결과 90년대에는 다시
적자국이 되었다.

지금 한국은 물론 IMF체제하에서 그때보다 더 강한 외세의 압력하에 있다.

그러나 정부가 앞장서는 외자유치는 정부의 재량이다.

대외적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 하더라도 공공요금을 올려가면서까지 외자를
유치할 필요는 없다.

유럽연합(EU)조차 부담을 느끼는 대미투자협정을 우리가 서둘러 체결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민간기업에 외자유치를 만병통치약처럼 강권하다시피 하는 것도 재고해야
한다.

이런 조치가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손상시킨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나라에게 외국인의 신뢰라는 것은 덧없는
것이다.

여건이 좋다 싶으면 투자하겠다고 나서고 자국정부를 동원해서 개방압력까지
넣지만 여건이 나쁘다 싶으면 썰물처럼 빠지는 것이 외국인 투자다.

한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기회를 잡는 것은 개인의 사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는 것과 같다.

한번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같은 엄혹한 세계질서하에서는 기회가 다시 안올지도 모른다.

한국경제가 또다시 넛크래커에 짓눌리는 호두 신세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 환율과 외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