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직후 한국에는 모두 여섯개나 되는 임시정부가 출현했다.

그 가운데 조선민국, 기호지역의 신한민국 임정이나 평안도의 대한민간정부
등은 안에 지나지 않아 거론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러시아령의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임정(3월21일) 상해임정
(4월13일), 한성임정(4월23일)은 각종 독립운동 대표자회의를 거쳐 각료와
약헌까지 확정한 정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보다 다행스런 것은 3개의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할뻔 했던
임정이 1919년9월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상해임시정부의 대표성과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만 보면 최초로 수립된 연해주 대한국민회의 임정은 오히려
상해임정 보다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연해주를 비롯 한러시아의 각 지방과 북간도를 포함해 수십만명의
한국인을 기반으로 한 정부였다.

상해에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국외에서 한민족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 블라디보스톡,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역이다.

한때 홍범도나 김경천장군이 활약한 지역도 역시 연해주였다.

따라서 먼저 임정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 임정을 연해주지역에 두려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통합과정이야 어찌됐든 이동휘를 주축으로 한 연해주 임시정부가 안창현의
설득으로 상해임정에 주도권을 양보한 것은 획기적 사건이다.

지난 18일 상해임정 80주년을 기념해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연해주 한인독립운동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서는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연해주 한인독립운동과 상해 임정과의 이런
관계가 비교적 상세히 밝혀져 관심을 모았다.

발표자들은 한결같이 연해주 독립운동의 비중은 사실과 일치하게 높이 평가
해 한국근대사속에서의 위상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햇볕이
비치는 것일까.

반쪽만이 아니라 온전한 독립운동사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나 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