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방 < 인하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jkim@inha.ac.kr >

"나는 매일 아침 면도하면서 거울에 비친 진보적 케인스주의자를 본다.

거울 속의 그는 생애의 가장 좋은 시절을 케인스와 신고전파적 주류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데 보냈다"

< 새뮤얼슨의 편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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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들어서면서 케인스혁명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케인스경제학은 거시경제분석을 지배했으며 그 메시지는 경제학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에게도 전파됐다.

그 메시지는 낙관적인 내용이었다.

정부 개입에 의해 시장 실패는 치유될 수 있으며 대공황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1946년의 "고용법"에 의해 완전고용이 국가의 의무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수요를 증대시켜 완전고용을 달성하려는 정책은 그 후로도 오랫
동안 취해지지 않았으며, 균형재정의 원칙은 여전히 고수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케네디정부에서 바뀌었다.

케네디대통령은 1962년 예일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케인즈경제학을 승인하고
대규모 조세감면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대통령직을 계승한 존슨에 의해 실행됐다.

그리고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는 이 정책이 "7백만의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케인스혁명의 승리는 헌신적이고 유능한 경제학자들을 필요로 했다.

새뮤얼슨은 그러한 경제학자들중 한 명이었다.

새뮤얼슨은 경제이론가로서 승수효과와 가속효과를 결합한 동태적 케인스
모형을 만들었으며, 임금 혹은 물가와 실업이 안정적 역관계를 갖고 있다는
필립스(A. W. Phillips)의 주장을 미국 경제에 적용했다.

그리고 거시적 케인스경제학과 미시적 신고전파경제학의 종합에 관해 논의
했다.

그러나 경제이론가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케인스혁명의 승리와 관련한 역할은 다른 두 부문에서 더 컸다.

그는 가장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 저자로서 케인스경제학을 전파했다.

이 교과서는 시장경제는 만성적 실업을 수반하며, 적절한 정책을 통해
완전고용이 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을 널리 받아들이게 했다.

그는 학술토론이나 정책토론은 물론 자문과 기고를 통해서도 케인스경제학을
전파했다.

여러 정부기관의 자문에 응했으며, 의회에서도 증언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언자였으며, 대통령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또 15년간 뉴스위크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게재했다.

새뮤얼슨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부각시킨 거시경제문제는 실업 물가 성장
이었다.

그에게 재정적자나 공공부채는 그 다음의 쉬운 문제일 뿐이었다.

한편 그는 소득의 재분배를 위한 누진세와 실업자 구제를 위한 재정지출을
지지했으며, 독점을 방지하고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한 규제에도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교육 보건 기술에 대한 정부의 투자도 지지했다.

그가 "진보적(liberal)"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그의 미국적 진보주의는 유럽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시장의 불완전성과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시장 대 국가의
대립에 대해서는 중도적이다.

새뮤얼슨은 거시경제정책에서 규칙을 세워서 따르는 것에 반대하며, 상황에
따른 조정을 주장한다.

그는 또 통화량만이 명목국민소득을 변화시킨다거나 통화량은 장기적으로
물가만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프리드만(M. Friedman)의 통화주의를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그가 제안하는 경제정책은 절충적이다.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 사이에서 절충적이라는 얘기다.

예컨대 화폐의 역할과 통화정책의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역할이나 효과의
크기는 미미할 것이라고 말한다.

새뮤얼슨의 이러한 중도주의와 절충주의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완벽하게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새뮤엘슨이 가진 영향력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그의 적들은 그를 "지적 곡예사"라고 부르면서 폄하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