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여름 실종됐던 태풍이 올해 때늦은 가을에 찾아들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여름은 태풍과 더불어 시작해 태풍과 함께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름철 태풍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1904년 국내에서 처음 태풍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늦게 태풍이 나타났는
가 하면 태풍이 가장 빈발하는 여름철(7,8월)의 발생 건수도 예년 수준을
훨씬 밑돌았다.

오히려 가을 들어 태풍 발생이 차츰 늘고 위력도 강해지는 이상현상을
보이고 있다.

<> 태풍 지금까지 몇개나 발생했나 =올해 제1호 태풍은 지난 7월8일 발생한
니콜이다.

1973년 제1호 태풍이 가장 늦게 발생한 기록(7월2일)을 깼다.

이는 "한여름의 태풍 실종현상"의 시작이었다.

지난 7월과 8월에 발생한 태풍은 모두 4건.

작년 같은 기간 11건의 절반도 안된다.

예년 같으면 8월말까지 평균 15개의 태풍이 발생하고 이중 2~3개가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올해는 우리나라를 모두 비켜갔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9월들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달 들어서만 4개의 태풍이 발생해 모두 8개로 늘어난 것.

그렇더라도 올해는 태풍이 유례없이 적은 해가 될 전망이다.

연간 평균적으로 태풍이 28개 정도 발생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지난 30년동안 태풍이 가장 적게 발생했던 해는 19개를 기록한 69년, 가장
많았던 해는 39개의 태풍이 출몰했던 67년이다.

태풍 발생 빈도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반드시 상관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평균적으로 7,8,9월에 발생한 태풍중 일부가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줬다.

섣부르긴 하지만 올해 태풍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 태풍이 실종됐던 까닭은 =기상청은 엘니뇨의 영향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작년말 한껏 기세를 떨치면서 사상최대의 기상이변을 몰고 온 엘니뇨가
한여름 태풍 실종에 한몫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태풍의 진원지로 알려진 필리핀 주변에서 마셜군도에 걸친 태평양(북위
5~20도)에 형성된 고기압 세력이 워낙 강해 열대성 저기압인 태풍 발생을
억제했다고 기상청은 분석했다.

특히 엘니뇨때 나타나는 현상인 무역풍(동에서 서로 부는 편동풍)이 약화
되면서 태풍 발생 요건인 바람속도차이(수평방향)를 줄였다는 설명이다.

바람속도차이가 클수록 대기가 불안정해져 태풍이 발생하기 쉬워진다.

이른바 태풍의 요람으로 불리는 열대성 수렴대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열대성 수렴대는 필리핀 동해상의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위 5도 사이에 강한
비구름대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비구름대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이 해상의 습한 공기와 맞부딪치면서
형성된다.

비구름대가 활성화되면서 생기는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으로 발달하게 된다.

해수면 온도도 낮았다.

태풍이 발생하려면 해수면 온도가 섭씨 26도 이상이어야 한다.

이는 수증기를 많이 증발시킬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이다.

공기중으로 올라간 수증기는 응결하면서 공기로 바뀐다.

이때 열을 방출하게 되며 동시에 공기를 빨아 올리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태풍이 세력을 키워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러나 올해 수증기는 태풍의 진원지인 필리핀 주변 보다는 중국의 양쯔강
유역으로 많이 몰려갔다.

지구상의 수증기는 일정 하기 때문에 한쪽이 넘치면 한쪽이 부족하게 돼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태풍 실종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까 =9월 들어 4개의 태풍이 발생한
것만을 놓고 보면 단기적으로는 "아니다"라는 답이 적절할듯 싶다.

기상청은 속단하긴 어렵지만 엘니뇨 약화에 따른 현상으로 필리핀 주변의
강한 고기압 세력이 예년 수준으로 돌아 오면서 태풍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장기예보반의 양진관 사무관은 "태풍의 세기도 최근 강해지고 있다"
고 말했다.

연세대 대기과학과의 김정우 교수도 "엘니뇨가 쇠약해진 뒤 나타나는
라니냐의 징후가 이미 뚜렷해지고 있다"며 "지금은 태풍이 발생하기 좋은
조건인 것 같다"고 말했다.

라니냐는 해수면 온도가 낮아진다는 점에서는 태풍의 발생에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무역풍이 강해지므로 태풍발생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이다.

장기적으로 내년에도 한여름 태풍 실종현상이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전문가
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엘니뇨에 대한 전망도 하기 쉽지 않은데다 복합적인 요인이 얽히고 설켜
만들어내는 기후 패턴을 미리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엘니뇨는 작년말 세력(페루 연안의 해수면 온도가 잣대)이 지난 82~83년의
최고 기록을 깼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언제쯤 이 정도의 강한 엘니뇨가 또 나타날지는 예상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올해만 하더라도 과거의 태풍과는 전혀 다른 발생패턴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태풍 발생을 예견하기에는 기후 패턴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구온난화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엘니뇨 현상이 태풍의
이례적인 한여름 실종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기후 온난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는 인류의 에너지다소비형 산업구조
가 태풍의 때늦은 출현과 무관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오광진 기자 kj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