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철학 내지 경제관은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과
달리 비교적 일관된 흐름을 이어왔다.

그가 제창한 "대중경제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자유경제원리를 존중하면서 특권층이 아닌 대중을 위한 경제체제구축이
핵심을 이루고있다.

하지만 역대정권이 필요에 따라 그의 경제관을 달리 색칠해 오도한 면이
적지않다.

물론 그 스스로도 대내외 환경변화를 수용, 시대별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김대통령은 집권후 정책근간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란
한마디로 표현했다.

40여년간의 변화와 손질 끝에 탄생한 "DJ 노믹스"의 역사를 짚어보자.

<>70년대=이 시절 김대중의 경제관은 상당히 현실 비판적이었다.

유신정권으로부터 가혹한 정치탄압을 받던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우선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시각이 특히 부정적이다.

대기업의 일부행태를 외국자본과 결탁해 민족자본을 억압하는 매판자본의
성격으로 규정짓기도 했다.

관료들 또한 매판자본과 야합해 경제를 망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견해였다.

이때문에 매판적인 외자도입을 배격하고 건전한 민족자본육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IMF체제에 들어감으로써 "한국에 들어온 외국기업은 한국기업"이라고
역설할 정도로 외자유치에 치중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동문제에선 다소 과격했다.

"노사협조란 어용화가 아니면 자본에의 종속을 위한 것"이라며 "쟁의의
일상화"를 역설할 정도였다.

지금은 안된다고 주장하는 노조의 경영참여도 당시에는 법제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그의 경제관은 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내건 선거공약에 잘
나타나있다.

사회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과감한 소득재분배, 부유세신설, 외국자본에
의한 국민경제지배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80년대=80년대 초 미국 망명생활은 그의 경제관 변화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때 이후 시장경제 중심의 개방적 사고로 더욱 확고히했다.

자주 접촉했던 유종근 전북지사 등과 같은 시장경제론자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한국경제를 관치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빨리 바꿔야 한다"며
"독과점의 폐단을 분쇄할 최선의 무기는 자유무역"이라고 주장했다.

대외경제관도 변화를 보였다.

"한국의 경이적인 수출신장이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차관을 낭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나쁘지만 대외부채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또 대기업을 정경유착의 적극적인 수혜자에서 수동적인 수혜자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대중경제론"에 이같은 시각들이 상세히 담겨있다.

기업인도 정권과 결탁해 특권을 누린 반면 막대한 정치자금과 뇌물,
각종 세외세금을 내지않으면 안되는 불행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기업인이 민족경제발전의 떳떳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차별이나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90년대=대중 경제론이 민주적 시장경제론으로 발전된 시기다.

90년대초 동구권 붕괴에 대해 그가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승리로 봐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론"이 무르익던 시기다.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도 보다 현실적으로 다듬어졌다.

현실적인 비판을 제시하는데 치중했다.

87년과 92년의 대선 패배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때부터 노동자와 사용자가 한배를 탔다는 "협력적 노사관계"를
표방했고 "대기업은 대규모 중화학 분야, 중소기업은 경공업과 서비스
분야를 맡아 우리 경제를 협력해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쌍두마차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기업은 정부규제가 아닌 시장경쟁과 공정거래질서로 다스려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차병석 기자 chabs@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