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의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는 믿을 수 없다"

작년 가을, IMF 경제의 전주곡으로 외국인들이 증시에서 주식을 처분하고
떠날 당시 해외 펀드매니저들이 자주 내세웠던 이유다.

정부가 두 손을 든후 IMF팀은 한국에 들어와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다.

문제의 회계부문에 대해선 개혁을 넘어 "혁명"을 요구했다.

회계장부를 믿을 수 있도록 "한국 회계"의 틀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뜯어
고치라는 것이다.

은행 차입을 유리하게 끌어들이기 위해 당기순이익을 고무줄처럼 잡아
늘리거나 절세라는 명목아래 이익을 줄이는 분식회계에 익숙한 한국인의
"회계정서"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IMF체제가 아니더라도 외국의 시각이 지나치게 왜곡돼 있다고 반발할 수가
없다.

국내에서도 회계풍토를 개탄하는 자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계장부의 투명성을 확보해 분식회계를 척결해야 한다는 "혁명론"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한국 땅에서 이미 회계 혁명은 시작됐다.

올들어 하얀 종이위에 회계와 연결되는 기본제도와 조직구성도를 그리는
재창조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회계 세미나가 줄을 잇고 법률개정 작업이 뒤따르면서 회계 혁명의 성과가
벌써부터 가시화되고 있을 정도다.

현재까지 눈에 띄는 변화는 결합재무제표 작성이 법률로 의무화됐다는
점이다.

30대 기업그룹군은 내년인 99사업연도분부터 결합재무제표를 만들어
발표하도록 하는 법률이 지난2월 국회를 통과했다.

대통령의 시행령까지 공표됐다.

기업그룹군의 국내외 모든 계열사를 1개 기업으로 보고 하나의
통합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하는 이같은 제도는 세계적으로도 처음있는
혁명적인 변화다.

결합재무제표의 구체적인 작성양식을 정하는 기술적 문제만 남아 있다.

증권감독원은 올 10월안에 대기업들에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세부사항을 확정해 알려줄 계획으로 규정을 정비하고 있다.

국제회계기준과 구미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는 작업도 이미 끝났다.

금융감독위원회안에 대학교수와 회계사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설립돼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제도나 기준들을 정부당국에 제시해 놓은 상태다.

여러해에 걸쳐 비용을 조금씩 처리해 나가는 환차손을 단번에 털어내야
한다는 등 경영자들 입장에선 충격적으로 들릴만한 개혁안도 들어있다.

기업들이 분기별로 한해 4번정도는 재무제표를 공개해야 된다는 제안도
있다.

현재의 상반기말과 결산기 2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아예 회계기준이나 회계감사결과를 조사하는 업무를 민간기구에 이양하고
정부조직은 회계세계에서 제3자로 물러나 있어야 된다는 조직 개혁안도
등장했다.

기업의 회계장부를 공정하게 감사할 의무가 있는 공인회계사들의 책임도
무거워진다.

증권감독원은 감리(공인회계사가 적정하게 감사했는지를 조사하는 것)에서
고의성이 있거나 중대한 과실이 발견되면 회계사에 대한 형사고발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인회계사가 부실회계감사로 검찰에 고발된 사례가 아직까지
없다.

회계법인들도 투자자와 채권자들이 회계감사법인의 "브랜드"를 따지고
감리가 강화되는 추세를 보이자 자구책에 나서고 있다.

회계법인들의 통폐합으로 회계사 업계에서 전대미문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혁명이 있으면 보수적 세력의 방어도 있는 법이다.

결합재무제표 법률안을 만들 당시인 금년초 기업인들의 반발을 생각하면
된다.

연결재무제표 작성규정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결합"이라는
일방적인 급진론으로 기울고 있다는 재계의 주장도 분명 일리가 있다.

국제회계기준을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도 있다.

회계제도는 법체계와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역사성을 담고 있다.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설픈 국제화가 오히려 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계론도 적지 않다.

일부에서 회계시장 개방론을 얘기하는 단계에 이르자 공인회계사들은 물론
정부당국자들도 위험천만한 논의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업회계기준 변경안도 논란거리다.

환율변동이 심한 한국같은 나라가 외환변동으로 인한 장부상의 손익변화를
어떻게 한 사업연도에 전액 다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반박논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환율변동이 심하지 않은 선진국과 달리 개도국의 특성은 인정돼야 한다는
항변이다.

회계감사비용도 분쟁거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은행단과 회계법인들이 회계감사수수료 인상폭을 놓고 맞붙어
법정기한안에 회계감사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초유의 사건도 발생했다.

회계혁명이 시작되면서 예상할 수 있었던 필연적인 진통으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회계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힘든 조건을 안고 있다.

미국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어 공인회계사는 주주들의 이익만 대변하면
된다.

자연히 경영자의 실적을 냉정하게 감사하게 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경영인이 바로 기업 소유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엄격한
제도가 마련돼도 올바른 회계감사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비관론을 지울수
없다.

그렇지만 한국회계학회 회장인 남상오 서울대 교수는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회계혁명이 잘못되면 한국경제의 IMF개혁도 실패하는 것이라고.

< 양홍모 기자 y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