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많은 것들이 정체성의 혼돈에 빠져 있다.

예술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수없이 되뇌여봐도 요즘처럼
예술작품의 개념과 본질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없는것 같다.

이 문제를 캐고 들어가면 무수한 철학적인 개념까지 꺼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현상 속에서 현실적 문제가 되는 두 가지 화두만 압축해
보자.

"예술작품은 상품인가"와 "예술작품은 상품을 넘어서는 또 다른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예술작품은 상품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라는 신념은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미술계에서는 극단적인 두 가지 경우가 모순적인
관계로 동시에 노출되어 있어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엄연히 자본주의의 상황 아래서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상품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예술작품의 거래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임자를 만나기에 따라 똑같은 것이라도 그것이 한낱 휴지가 될 수 있는가
하면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최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있는 경우와 또한
지나치게 상업적인 것으로 부각되어 있는 경우가 공존하고 있다.

어찌보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으나 어느 면에서는 문화의 수준과 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제이다.

며칠전 H은행과 S보험, 그리고 미술품 경매회사가 공동으로 미술품
담보대출시행에 들어갔다.

물론 환금성이 낮은 현대미술작품보다는 채산성이나 안정성에서 우위에
있는 고미술품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일정한 시점에 가서 현대미술 혹은 동시에 미술작품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 얼마전엔 모 화랑이 현대미술 작품을 싯가보다 싸게 할인하여 판매한
적이 있다.

당연히 많은 소장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운집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부분적인 일로 치부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러한 현상은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예술작품을 둘러싼
우리의 시장 환경이 변화되고 아울러 그 개념과 본질도 변화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작품이 일반적 상품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가하면 예술작품을 일반적인 경제논리로만 보는 시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전 미술계 전체가 서화및 골동품 양도세 부과시행을 저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결국 당국에서는 타협방안으로 시행을 3년 유보하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이에대해 미술계가 적지 않은 반발을 보였다.

대체로 반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예술작품을 경제적 잣대와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입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같은 불황기야말로 그림을 사둘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증권이나 부동산같은 것으로 본다면 그렇다.

환금성이나 채산성만을 염두에 두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심리적 위축이 가져오는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오랜
경험에서 감지되고 있다.

자금 압박보다 심리적 위축이 더 큰 장애요인이 되는 미술시장의 특성에
비춰볼 때 가슴으로는 선뜻 수용이 되질 않는다.

요컨대 예술작품이 고도의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간주되는 것은 오늘의
환경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조금은 차별화되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상품화 이전의 문화예술적 힘과 질이 없고서는 상품화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예술가나 화상, 컬렉터 모두가 좀더 진지한 문화의식으로 접근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