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영상기억매체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의 규격을 둘러싸고 제조
업체들 간에 표준화 전쟁이 본격화됐다.

굴지의 전자업체들이 당초 단일표준 합의를 깨고 독자적인 규격 개발을
잇따라 선언했다.

지난 70년대말 VTR 규격을 놓고 베타방식의 소니와 VHS방식의 마쓰시타가
한판 승부를 벌인 이래 20년만에 싸움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양상은 과거보다 복잡하다.

다수 전자업체들이 "적과 동지" 관계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미국의 영화
흥행업체들도 깊숙이 연루돼 있다.

DVD가 비디오 오디오 컴퓨터 기능을 통합하는 멀티미디어매체여서 부문별로
대결판도가 달라지는 탓이다.

최대 격전장은 시장규모가 가장 큰 비디오부문.

일본 마쓰시타가 지난달 이른바 "디븍스(Divx)" 기능을 갖춘 DVD플레이어를
독자적으로 생산할 방침이라고 선언했다.

당초 도시바 등 10여개사와 단일 표준에 합의한 약속을 스스로 깨뜨린
것이다.

디븍스DVD는 일반DVD에 암호를 입힌 뒤 개당 판매가격을 내린 대신 일정
시간후부터는 요금을 부과하도록 설계됐다.

전자업체 제니스와 톰슨, 영화사 디즈니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등도
마쓰시타를 따라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디즈니는 자사 영화를 디븍스DVD 뿐만 아니라 일반DVD타이틀로도
생산키로 했다.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전략에서다.

오디오 부문에서도 대결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DVD에 적용하는 방식을 놓고 이견이 표면화
됐다.

이후 소니와 파이오니어 등은 독자규격을 개발중이다.

이들은 DVD가 CD를 대체하는 순수 오디오매체로도 발전할 것으로 내다보고
이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심사다.

컴퓨터로 운용되는 DVD램 분야도 마찬가지.

지난 8월 소니와 필립스 휴렛팩커드가 다른 규격을 공동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추진중인 규격은 3.0기가바이트 기억용량의 DVD램이다.

마쓰시타 등 다수 전자업체들은 2.6기가바이트 DVD램을 표준으로 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관련업체들은 당초 이런 식의 대결을 원치 않았다.

과거 VTR 규격전쟁에서 패했던 소니가 엄청난 손실을 입은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도시바와 타임워너가 이끄는 연대세력과 소니와 필립스의 제휴세력
등 굴지의 10여개 업체는 지난 95년말 DVD의 공동 규격을 개발키로
합의했었다.

영화소프트웨어를 담당할 할리우드 흥행업체와 컴퓨터업체 인텔 마이크로
소프트까지 표준화대열에 참가했었다.

가전과 컴퓨터에 디지털영상소프트웨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시대로 접어들
게 분명하다는 인식에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맹약에 균열이 커졌고 이제 한 판 대결이 불가피
하게 됐다.

각 회사들이 엄청난 규모의 시장에서 더 많는 이익을 챙기기 위해 합의를
저버린 것이다.

일본 전자산업협회는 오는 2000년께 DVD시장이 15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전자업체들은 DVD가 80년대 후반 캠코더 이후 침체된 가전시장을 부흥시킬
"특효약"으로 보고 있다.

흥행업체들은 소비자들이 비디오테이프 대신 영화DVD타이틀을 수집할
것으로 기대한다.

컴퓨터업체들은 DVD램으로 CD롬을 대체해 고속성장세를 이어갈 방침이다.

그러나 표준화전쟁에 불이 붙자 DVD의 보급속도는 늦어지고 있다.

올들어 지난달까지 미국에서는 1만8천대의 DVD플레이어가 판매됐고 50만장
의 영화DVD타이틀이 판매됐을 뿐이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전자업체들이 내놓은 DVD의 매출도 기대이하로
저조하다.

소비자들이 표준전쟁에서 패배한 제품을 사면 과거 베타방식 VTR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표준화전쟁에서는 누가 더 많은 세력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각 연대세력은 이를 위해 소비자잡기에 전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업계는 이 전쟁의 성패가 4~5년 후에는 판가름날 것으로 보고 있다.

< 유재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