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한일은행장>

최근 북한 관련 보도들을 보면 우리가 끼니를 걱정하며 어렵게 살던
50-60년대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열심히 땀흘려 오늘을 만든 거칠어진 손들을 생각나게 한다.

어떤 이는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맞으며,또 어떤 이는 서독의 탄광에서
분진을 마시며,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서구에서 백년
이백년이나 걸린 산업화를 30여년 만에 이룩해 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경제개발 과정이 결코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70년대 오일쇼크 때에는 우리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빛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어려울수록 너의 일,
나의 일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돕고 하나되는 가운데 더 나은 발전의
원동력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전통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어렵사리 이룩해놓은 우리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아시아의 네마리 용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으면서 온 세계의 찬사를 한몸에
받아온 우리경제가 이제는 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선진국들로부터
"아시아의 지렁이"가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기에 이른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나 더욱 우려되는 것은 각종 경제지표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시기에 우리 국민 모두가 가졌던 서로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를 이겨낸 기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번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한수 위인 축구강국들을 맞아
대등한 경기를 펼치던 우리 팀이 다소 전력이 처지는 팀에는 오히려 고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축구강국을 맞아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우리 축구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과학적인 데이터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바로 기인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병을 기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안다.

즉 겉으로 나타난 증상뿐만 아니라 그 증상의 원인이 된 몸속의 기의
흐름을 바로잡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작금의 우리 경제도 이제 그 근본적인 치유책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 경제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70년대와 비교해 보면 객관적인
여건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성장의 시기에 온 국민이 가졌던 기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면이다.

지금의 위기상황을 오히려 절호의 기회로 삼아 우리의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는 소중한 자산인 자심감과 기를 살리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시야를 좁혀 기업경영을 보면 불황기라고 하여 너무 감량경영만을 고집하여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기를 죽이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대그룹에서 인위적인 명예퇴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오히려 경영이 향상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조직이 커지고 기계화 되어 사람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기업인 것이다.

조직구성원 하나하나의 역량이 극대화될 때 그 기업은 발전하는 것이며
그 기업의 흥망성쇠는 조직구성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최근 TV나 신문을 보면 과소비 풍조가 주품해지고 있다.

또 민간차원의 소비절약운동, 나아가 경제살리기 운동에 너 나 할것없이
참여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번기회에 금융계를 포함한 경제계는 물론 학계.정계.공직자와 언론계
등 사회 각 계층 사람들이 서로를 다독거리며 기를 되살려 침체돼 가는
사회분위기를 일신하는데 앞장서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앞으로 3년후면 21세기가 열리게 된다.

이미 세계는 새로운 세기를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다.

우리도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위험이 닥치게 되면 자신도 알수 없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운 국면을 오히려 내면에 잠재돼 있는 기를
일깨워줄 절호의 기회로 삼아 도도한 변화의 물결에 당당히 맞서야겠다.

기가 살아야 경제도 산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