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번호 017421"

"75년이후 기록된 공식 헌혈횟수 1백55회"

"세브란스병원 시신기증예정자"

이하영(63) 금강엘리베이터 및 유일엘리베이터 회장이 갖고 있는 특이한
기록들이다.

이중에서도 20년이 넘게 연간 10회에 가까운 헌혈기록은 보통사람이 실행
하기 힘든 것임이 분명하다.

6.25 직후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군복무를 한 이회장은 부대이동중 트럭이
뒤집히면서 불이나는 바람에 중상을 입어 국가보훈대상자가 됐다.

함께 타고 있던 7명중 운좋게도 유일한 생존자였으나 화상과 골절상
등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5년간 육군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사경을
넘나드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당시 수혈받은 양만도 35병(1만5천cc)이나 됐다.

공상으로 전역하고 건강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부산 어린이농예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다시 찾은 삶에 대한 감사의 뜻을 사회복지시설에서 부랑 청소년을 돌보는
봉사활동으로 사회에 전하겠다는 다짐에서였다.

처음 헌혈을 시작한 것이 이 무렵.

봉사활동에 진정한 사랑의 실천인 헌혈을 더하게 된 것이다.

동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지난 63년 부산국제시장 춘애병원 앞을 지나던 그는 우연히 한 노파와
마주치게 된다.

노파는 아들의 수술에 필요한 피를 구하려 행인들을 붙잡고 절규하고
있었다.

당시는 매혈에 의존했던 때라 혈액 구하기가 지금보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던 시절이었다.

입원중에 자신이 수혈받았던 생각이 들은 이회장은 망설임없이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헌혈은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해지던 부산 복음병원의
장기려박사와 인연을 맺으며 계속됐다.

특히 장박사와 개성 송도중학 선후배지간이던 이회장은 장박사의 요청이
있을 때면 언제나 달려가 피를 나눠줬다.

그렇게 부산에서 헌혈한 것이 50여회 가까운 것으로 이회장은 기억한다.

얼마후 서울로 직장을 옮긴 그는 66년 현재의 회장인 원종목씨와 함께
동양엘리베이터(주)를 창립했다.

회사는 70년대초 아파트 열풍과 함께 확장일로를 걸었고 79년 동양
엘리베이터를 떠나 화물.주차용 승강기 업체인 유일엘리베이터를 설립했다.

눈코뜰새없이 사업에 바쁜 가운데서도 이회장의 헌혈증서는 계속 늘어만
갔다.

환갑이 지난 지금 조카들에게 경영을 맡긴 상태에서 이회장이 요즈음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직책은 적십자사 중앙혈액원의 5회이상 헌혈자 모임인
"헌혈봉사회" 고문.

직접 가두 헌혈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이 헌혈한 후 얻은 헌혈증서를
부활절때마다 대학생 봉사단에 기증하기도 한다.

위급한 사람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쁜 와중에서도 이회장이 계속 헌혈에 참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의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연간 헌혈횟수를 4회정도로 줄인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라며 이회장은 웃는다.

"O형인 혈액형 덕분에 누구에게나 피를 나눠 줄 수 있는게 고맙다"고
말하는 이회장은 "정상적인 성인은 1년에 3~4회 정도 헌혈을 해야 더욱
깨끗한 피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생명인 더운 피로 국가와 사회, 겨레를 생각하는 삶을 걷고 있는
이회장의 사랑 실천은 우리에게 "보훈의 6월"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 장유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