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정부가 업무 첫날부터 "빅뱅"을 터뜨렸다.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6일 기자회견을 갖고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완전독립을 선언한 것.

브라운장관은 "재무부가 갖고 있는 금리결정권을 영란은행에 주겠다"고
밝혔다.

영란은행의 별명은 "금융가의 촌스런 여편네(Old Lady of Threadneedle
Street)".

한때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렸던 한국은행처럼 아무 결정권없는
중앙은행의 대표적인 표본이었다.

1694년 전쟁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민간은행에서 국가기관으로
돌아선것도 불과 50년전인 지난 46년의 일인 만큼 그럴만도 했다.

이런 영란은행이 브라운장관의 한마디로 3백년만에 미국 FRB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같은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반열에 놓이게 됐다.

"금리결정권"은 한나라 경제를 통제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중 하나.

이를 중앙은행에 넘겨줄 경우 정부는 정책운용의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정부가 금리결정권을 갖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단기간에 경제를 부추키기 위해선 돈을 맘대로 풀수 있는
정책수단(금리인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장을 중시한 보수당정부는 그래서 금리결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민생활을 중시하는 노동당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해 이를 중앙은행
몫으로 넘긴 것이다.

영란은행의 완전독립은 금융계의 전폭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

"씨티"로 불리는 런던 금융가는 한동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을 정도다.

"만약 메시아가 지상으로 내려 왔다면 이처럼 했을 것"이라고 밝힌
데이비드 불럼 제임스카펠사 조사담당임원은 "브라운장관의 발표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어서 씨티의 금융맨들은 거의 넉이 나간 상태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시장에 그대로 반영됐다.

1.6212달러선에서 움직이던 파운드화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1.6373달러
선으로 뛰어 올랐다.

FT100지수가 63.7포인트(1.4%) 오른 4,519.3을 기록하는등 증권시장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며칠전까지 재무장관이었던 케네스 클라크(보수당)는 "브라운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인플레에만 관심이 있는 중앙은행은 금리를 계속 올릴 것이므로 성장은
둔화되고 국민들은 불필요한 고금리에 고생하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재계인사들도 지나친 금리인상은 파운드화의 가치를 상승시켜 수출에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며 우려한다.

그러나 노동당정부는 자신만만하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고물가에 시달렸다. 이는 다른 나라들처럼 독립된
중앙은행을 갖기 못했기 때문이다"(브라운장관)고 못박았다.

보수당이 중앙은행 독립을 거부한 것은 경제위축보다는 표가 떨어져 나갈
것을 겁냈기 때문이라며 역공을 펴고 있다.

인플레를 중시하는 브라운장관은 이날 금리결정에 관한 마지막 권한행사로
중앙은행 재할인율을 연 6.0%에서 6.25%로 인상했다.

내년도 물가인상률을 목표선인 2.5%안에서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이는 곧바로 일반은행들과 주택대출기관의 금리인상으로 이어졌다.

금리결정권의 완전한 이양을 위해선 51년동안 고치지 않았던 은행법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다음주 개원되는 새 의회는 노동당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빠른
법개정에는 아무런 걸림돌도 없을 전망이다.

중앙은행독립은 노동당정부의 과감한 경제개혁을 예고해 준다.

그러나 인플레를 잡지못할 경우 개혁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런만큼 물가지수는 블레어 경제개혁의 성공여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 영란은행의 역사 >

1694년 패터슨의 제안으로 설립
1824년 지점설치 인정
1833년 영란은행권 법화로 인정
1854년 은행간 결제은행으로 인정
1928년 정부화폐 은행권으로 병합
1946년 노동당정부에 의해 국유화
1997년 완전독립(노동당 정부)

< 육동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