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이며/새날은 또 언제 밝는가"

그리스의 세계적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자신의 영상철학을 시로
표현한 구절이다.

그는 어두운 역사에서 희망의 빛을 뽑아내는 작가주의 연출의 거장.

"안개속의 풍경"은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찾아 떠나는 남매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시적 은유와 서정적인 영상이 잘 조화된 예술영화.

황금분할을 활용한 구도나 무채색의 명암대비, 원거리촬영으로 잡은
풍경등은 철학적 명상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신화를 잃어버린 나라 그리스.

화려한 옛영화를 뒤로 한채 현대사의 끝자락으로 밀려난 국가.

아버지가 없는 오누이의 운명은 우울한 그리스의 현실을 닮았다.

아버지가 있는 구원의 땅은 어디인가.

남매는 날마다 눈발 날리는 역에서 독일행 기차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들에겐 기약이 없다.

희망역으로 가는 차표는 공짜가 아니다.

무임승차에는 또다른 대가가 따른다.

검표원에 들켜 도중 하차당하고 길에서 트럭을 얻어타는 남매.

11살 소녀는 트럭운전사에게 강간당하고 유랑극단의 청년단원에게선
첫사랑의 아픔을 맛본다.

칠흑같은 밤 국경지대에 도착한 둘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수비대의 총소리가 들리고 침묵이 흐른 뒤 안개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들.

안개가 걷히면서 언덕위의 나무 한그루가 희미하게 보이고, 그곳으로
달려가 나무를 껴안는 남매의 뒷모습이 원경으로 멀어진다.

롱테이크와 짧은 시퀀스, 원거리샷을 적절하게 배합한 연출기법이
독특하다.

작품을 들뜨지 않게 조율하면서 잔잔한 감동으로 이끄는 비법이다.

쏟아지는 비와 잿빛 해변, 구름이 낮게 깔린 황혼녘의 산야등 우수어린
풍광들이 애절한 선율과 섞여 주제의식을 돋보이게 한다.

(21일 코아아트홀 씨네하우스 동숭씨네마텍 개봉)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