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은 해방이후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
의 제반 모순이 사회변화 과정에서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패한 정치인과 후진적인 정치풍토와 관행, 관주도 경제의 규제천국이
전대미문의 비자금사건을 만들었다고 할수 있다.
이번 비자금 사건은 사회 선진화과정에서 한번은 지불해야 할 코스트인
동시에 향후 국가사회의 운명을 좌우할 시금석이다.
후유증과 코스트를 최소화하고 사회 선진화의 계기로 삼기 위한 국민적
슬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비자금 사건의 처리과정을 살펴보면 우려되는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비자금 사건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는 축소되고 정치권의 당리당략을 위한
무한 파워 게임 양상으로 치닫는 것 같다.
언론도 사회적-구조적 문제로 접근하여 방향을 제시하기 보다는 현상
위주의 선정적 보도에 치중하여 불안감만 가중시키고 있다.
이와같이 비자금 사건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정부-언론-기업 어느 누구도
책임있게 미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비자금 사건도 한달을 넘기고 있다.
더욱이 5.18특별법 제정으로 또 한차례 나라가 폭풍에 휩쓸릴 전망이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지킬 것은 지켜나가야 한다.
올해 우리는 대망의 수출 1,000억달러를 돌파하였고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할 전망이다.
이러한 경제성장이 5-6공 군사정권에 대한 단죄와 사회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최근들어 해외각국의 언론에서는 노씨 비자금 사건을 맞이하여 우리 경제의
치부를 경쟁적으로 과장 보도하고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우정어린 충고이기 보다는 우리경제에 대한 견제와
경계심리에서 나온 매도로 생각한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속에서 기업의 생존을 위하여 과오를 범하는
우리 기업에 돌을 던진다면 해외의 어느 누가 우리기업을 믿고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자금 사건에 대한 기업의 잘못을 따지고 매섭게 질책하는 한편으로 기업
에 대해 관용과 성원도 보내주어야 하는 충분한 시대적 이유가 있다.
먼저 과거의 관점에서는 "생존의 논리"이다.
과거 5공시절 국제그룹의 공중분해에서 보았듯이 정치논리가 경제를 지배
하고, 인.허가권등 정부가 기업의사활을 결정할수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초연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즉 비자금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업의 안전을 담보하는 일종의 생존세로
볼수 있다.
최근 비자금 리스트에 특정한 한두개 기업이 아닌 우리나라 30대 재벌기업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와같은 생존의 논리를 잘 대변해 준다고
볼수 있다.
한편 현재의 관점에서 볼때는 "경쟁의 논리"이다.
WTO(세계무역기구)시대의 국제경쟁은 포성없는 경제전쟁이다.
경제전쟁의 우리측 대표선수는 싫든 좋든 우리 기업일수 밖에 없다.
뒤에서 쫓아오는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등 후발국 기업과, 앞으로 뛰어
나가면서도 우리 기업들에 대한 견제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일본 구미등
선진국기업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기업들로서는 과거의 역사에 발목
을 잡혀 주저할 시간이 없다.
세계시장의 변화를 남보다 먼저 선견-선수-선제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진화의 논리"이다.
최근 일본에서 발표된 한 문헌에 의하면 초일류 기업의 모습이 기업규모와
생산성에 바탕을 두었던 "강한 기업(Strong Company)"으로부터 창의성과
유연성에 경쟁력의 뿌리를 두는 "현명한 기업(Smart Company)"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초일류 기업의 모습은 향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도덕성
과 사회성에 바탕을 두고 사회로부터 폭넓은 신뢰와 사랑을 받는 "좋은 기업
(Socio Company)"으로 바뀌어 진다고 한다.
과거 "강한기업"의 논리에 빠져 기업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가 최근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다소 "현명한 기업"으로 변모해 오던 우리기업들은 이번의
비자금파문을 계기로 미래의 초일류 기업상인 좋은 기업-사회적기업으로
다시 태어날수 있는 커다란 계기를 맞이했다고 볼수 있다.
과거에 대한 단죄는 쉽고 관용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인들에게 과거의 관행적 과오를 단죄하기 보다는 깨끗한 경제를 만들어
가고, 올바르게 기업을 경영하는 미래 역사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
기업인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된 정경유착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여야 하며
이제는 국민적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내부 혁신과 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비자금사건 이후 실물경제의 지표 움직임에 대하여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계와 일반국민의 심리적 불안감과 위축일
것이다.
이제는 비자금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비자금터널의 바깥도
바라보아야 한다.
안심하고 생업에 매진하고 기업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비자금사건의
파문을 조기에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경제계 인사에 대한 단죄보다는 경제 정의실현을 위한 제도와 시스템
개혁 쪽으로 처리방향을 잡아야 한다.
기업인에 대한 국민적 관용과 애정으로 기업이 국가와 사회발전에 명예롭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국가와 사회발전에 노력하는 기업시민의 역할을
기대해 보자.
앞으로의 사회는 국민 모두가 기업경영의 파수꾼이 될 것이므로 기업은
부의 사회환원과 사회공감 경영을 통하여 사회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느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느냐의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쪼록 이번 노씨 비자금 사건이 과거의 잘못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방아쇠가 될 수 있도록 정부-기업-국민 모두가 힘을 합치고 우리가
지불해야할 코스트를 최소화하는데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