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이홍구국무총리의 발언에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재계에 대한 개혁적인 변화조치가 필요하다며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지난 9월 제기했던 사외이사제 도입등을 재추진할
의사를 분명히 한 이총리의 이날 언급은 기업들의 걱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마침 대기업그룹 총수들의 검찰소환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끝이어서
더욱 그렇다.

재계는 특히 이총리의 발언은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오던 자율화 개방화라는
대기업 정책기조를 ''비자금''을 빌미로 급선회하려는 신호탄이 아니겠느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H그룹 기획조정실 한 관계자는 "이미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
스스로 백지화했던 세추위의 사외이사제 도입방안을 ''미묘한 시기''에 다시
들고 나온 이유가 뭐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S그룹의 K사장도 "재계는 정부가 사외이사제 등 대기업 규제정책을 다시금
거론한 배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총리가 사외이사제를 거론한 의도는 어느정도 짐작이 간다.

"지난번 세추위가 건의했던 사외이사제등이 제대로 도입됐었다면 비자금
사태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대기업 오너가 기업자금을
마음대로 갖다 쓸수 있는 경영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재계는 우리 현실에도 안맞는 사외이사제까지 다시 들춰내 한국의
과거 정치관행이 만든 비자금사건의 책임을 기업쪽으로 돌리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혈연 지연등 인맥이 중시되는 한국
기업풍토에서 외부이사등의 선임과 역할수행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미국에서 조차 사외이사제도는 각종 폐단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경우도 사장이 기업경영의 실권을 갖는 경영구조"라고
덧붙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영권 집중을 해소하려면 사외이사제 도입등 인위적
인 규제보다는 기업매수합병(M&A)등을 활성화해 최고경영자의 경영 성패를
제대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재계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또 사외이사제 도입 추진의 시기다.

왜 하필 비자금 파문이 한창인 지금 이미 백지화됐던 사외이사제 도입을
다시 들고 나왔느냐는 점이다.

비자금 파문으로 재계가 코너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들의 반대가
뻔한 규제책을 거론한건 뭔가 숨은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혹시 정부가 비자금사태와 관련 대부분의 기업에 사법조치등 "직접 징벌"은
가하지 않더라고 경영구조 수술이라는 "우회 처방"을 내리는게 아니냐는
걱정이다.

특히 14일의 강택민중국주석 청와대 환영만찬에 과거의 관례를 깨고 대기업
그룹총수들 대신 전문경영인들을 참석토록한 것은 이같은 경영구조개편과
세대교체 촉진 등의 돌풍을 예고한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이와관련 재계는 비자금 사건과 관련 어떤 식으로든 기업이 속죄양이
되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또 정부의 정책은 주변여건이 무르익었을때 시행되야 본래의 목적을 살릴
수 있지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인위적인 처방을 가하는 건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S그룹 관계자는 "비자금 사건으로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
기업들이 잔뜩 움츠러들고 있는 마당에 정부가 대기업 규제정책을 휘둘러
기업을 옥죈다면 경제적인 타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