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수사가 금융권과 공기업으로 번지는 조짐을
보임에 따라 금융권과 정부투자기관들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체를 중심으로 재계 안에서 머물던 비자금 태풍의 영향권이 드디어
금융계와 공기업을 포함한 경제계전체로 확산되는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점에서다.

돌풍의 영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현재로선 예단하기 어렵지만 지금의
풍향과 속도를 전제로 하면 대대적인 사정태풍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6공화국 기간동안 금융기관 59개가 신설되거나 격이 높은 기관으로 전환이
됐다.

신도시 원전 수도권신공항 고속철도토목공사등 6공기간중에 투자기관들이
처리한 대형 국책사업도 한둘이 아니다.

금융기관 신설및 전환은 과거 전형적인 "건수"에 속하는 이권사업으로
치부돼 왔다.

기관장 재임을 위한 인사청탁과 줄대기는 이미 몇몇 사례가 드러나 있기도
하다.

대형정부공사는 한국전력의 사례에서 보여 주었듯이 거액의 리베이트를
수반해 온게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은행등 금융기관과 투자기관들은 표면적으로는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금융권과 투자기관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 벌어진 대대적인 물갈이로
경영권이 바뀌었는데다 설혹 연루자가 있더라도 기관장 개인의 문제일 뿐
조직적인 비리는 아니어서 회사차원으로는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비자금을 만들만한 대형사업을 발주한 투자기관들은 내심 수사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선 정부투자기관중 가장 규모가 큰 공사를 하는 한전은 이미 원자력
발전소수주를 둘러싼 뇌물수수사건으로 지난해 안병화 전사장이 구속되는
일을 겪은터라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6공기간동안 한전은 월성원전 3,4호기와 보령 삼천포등 5개의 복합화력
발전소를 지었다.

"불려가더라도 전임자가 소환당할것"이라면서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또 드러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고있다.

이미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받은 포철의 경우엔 "세무조사에서도 별다른
비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큰 일이야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6공때 워낙 정치권의 보호를 많이 받아와 검찰조사에서는 전직
경영진의 일이라도 비자금조성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지
않다.

신공항공단도 입지선정을 둘러싼 특혜의혹이 일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번
수사에서 이부분이 집중조명될 경우 의외의 파장을 겪을수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은 고속도로차종선정과 차량제작컨소시엄 결정등이
신정부들어와서 이루어진터라 비자금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천안~대전 시험구간의 토목공사가 6공말기에 발주돼 당시의 관련
서류를 챙기는등 내부준비에 나섰다.

이밖에 토지개발공사는 6공당시 수의계약형식으로 토지조성공사를 맡긴게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도로공사는 서해안고속도로와 중앙.영동.남해고속
도로 서울외곽순환도로등을 군출신사장 재임중에 처리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은행들은 "노씨에게 돈을 줬다는 구체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는한 은행장들
의 소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검찰측의 공식 해명에도 불구하고
모든 안테나를 검찰쪽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금융권은 노씨의 비자금에 연루된 전현직 은행장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가는 상황이 벌어지면 신한은행 동화은행등에 들어있던 비자금이 밝혀질때나
주거래기업총수들의 검찰소환으로 겪었던 어려움보다 훨씬 강도높은 위기가
닥칠 것으로 보고있다.

더욱이 "은행권수사" 얘기가 나온 직후 S은행의 행장 이름까지 거론돼
뒤숭숭한 분위기를 더더욱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검찰이 은행장을 소환한다해도 은행에 남아있는
노씨자금을 확인하기 위한 참고인 형식에 불과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은행장들이 직접 비자금을 조성한뒤 이를 건네준 혐의를 포착했을 수도
있다"며 불안감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금융권은 6공의 비자금조성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이용만씨가 은행
감독원장(90~91년)과 재무부장관(91~93년)을 거쳤고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이원조씨도 5공과 6공의 정권교체기에 은감원장을 지낸 적이 있어
은행들이 이들을 통해 "떡값"을 노씨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문민정부직후 문제가 있을 성 싶은 행장들이 모두 갈려 문제가
되더라도 "전임자"들이 소환되기는 하겠지만 현직 임원에게 까지 불똥이
튈수 있다는게 은행권의 분위기다.

< 육동인.고기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