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여해가 우촌에게 장안까지 들어갈 여비와 필요한 음식과 물건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동안 딸 대옥을 가르치느라 수고했다면서 선물들까지
주었다.

대옥은 아버지를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아버님, 제가 꼭 영국부로 들어가야 합니까? 이전처럼 아버님과
여기서 살면 안됩니까?"

대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얘야, 잘 듣거라. 내 나이 오십이 다 된 터에 새장가를 들 생각은
없구나.

그러니 위로는 너를 돌봐줄 에미가 없고,아래로는 힘이 되어줄
형제자매가 없구나.

게다가 너는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하지 않느냐.

지금도 네 몸이 너무 약해 조금이나마 회복되기를 기다리느라
영국부에서 온 사람들이 떠나지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네가 외할머니와 외사촌 형제자매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내 걱정도
그만큼 덜게 되는 거지.

너도 좀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고 말이야. 네가 장성하게 되면
아버지와 같이 지낼 날도 있겠지"

대옥의 아버지 여해가 간곡히 타이르자 대옥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옥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영국부 사람들은 길 떠날 채비를
하였다.

먼저 강을 따라가야 했으므로 배를 타야만 하였다.

"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대옥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사람들을
따라 배에 올랐다.

"오냐, 부디 건강하게 자라야 하느니라"

여해가 대옥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그동안 꾹 참고 있었던 눈물을
마침내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이렇게 떠나보내야만 하다니.
여해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가민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대옥을 실은 배가 기우뚱거리며 포구를 떠나 강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는 대옥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촌은 두명의 시동을 데리고 다른 배에 올라 대옥이 탄 배를
뒤따라갔다.

여해가 우촌을 가정 대감에게 추천하는 편지는 앞 배에 탄 영국부
사람이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배는 하염없이 강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강 양편의 풍경들은 뒤쪽으로
뒤쪽으로 흘러 지나갔다.

인생만사도 이렇게 흘러 지나가버리는 것.하지만 우촌은 앞으로
전개될 인생에 대한 기대로 감상적인 생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