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만염동배를 비롯한 진기한 술들을 마시고 선녀들과 무얼
했나요?"

습인이 그 다음 상황이 궁금한지 두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무얼 하다니? 정말 일이 벌어진 것은 한참 후이고 술을 마시는 동안은
열두 무녀들이 나와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 홍루몽 열두곡
이라 하더군"

"홍루라면 여자들이 거처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나쁜 뜻으로
쓰이면."

습인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선녀들이 말한 홍루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나 실속은 없는 우리
인간세상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

홍루몽이라는 뜻은 인간세상의 허망한 꿈 정도 되겠지.

그런데 홍루몽곡은 박명사 장부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여자들의 운명에
관한 노래 같더군.

경환 선녀가 노래만 들어서는 그 뜻을 알기 힘들다면서 가사가 적힌
책까지 내손에 들려주었지만 그 가사 역시 그 의미를 헤아리기 힘들
더군"

보옥이 정말 모르겠더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세상에서는 여러 명이 노래를 부르면 대개 역할을 맡아 극을
하듯이 하잖아요? 생 단 정 말 추로 나누어서 말이죠"

"너도 그런 것을 아느냐? 하긴 우리 영국부에서도 극단을 초대하여
공연을 하기도 했으니까 너도 멀찍이서 훔쳐 볼 수는 있었겠구나"

"그럼요. 생은 남자역이고 단은 여자역, 정은 남자의 상대역, 말은
보조역, 추는 망나니역 이잖아요.

특히 정은 우락부락한 사람이 맡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리고 곡조나 가락은 남북구궁에 반드시 맞춰야 하고요"

"그렇지. 원나라의 남곡이든 명나라의 북곡이든 둘중에 하나를 택하여
그 가락을 따라야 하지.

다른 곡파들도 많지만 남북곡파 이외는 정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구궁은 원나라때 확정된 아홉가지 곡조인데 어떤 노래를 하든 그
구궁을 벗어나서는 안되지.

정국, 중려, 남려, 선려, 황종, 대석조. 그리고 또 뭐더라?"

"쌍조, 상조, 원조. 그렇게 아홉 곡조죠"

습인이 재치있게 보충해주자 보옥이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런데 선녀들은 그렇게 역을 나누어 부르지도 않고 서곡과 맺음
곡만 함께 부르고 한 곡씩 각자 부르는 거야.

서곡의 첫구절은 이렇더군. 천지만물 생겨날 적에 누가 애정의 씨를
뿌렸던가(개벽홍, 수위정종)"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