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시장의 위기가 속수무책의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다.

달러 폭락 추세는 눈사태처럼 확산되는데 이렇다할 대책이 없다.

시장의 힘이 막강해져 정부로서도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시장의 동요를 막기 위한 정부간 협조체제는 유난히 삐걱거리고
있다.

달러가 급락하고 엔화가 급등하자 일본은 6일 선진7개국(G7) 재무회담을
긴급 제의했다.

그러나 이튿날 이 제의를 스스로 취소해 버렸다.

일본의 제의 취소는 국제금융시장의 위기와 관련,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진국들의 공조체제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선진국들은 종래 금융시장에 위기가 닥치면 미국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이를 타개했다.

그러다보니 선진국 정부의 움직임은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신호로 여겨졌다.

투자자들은 각국 정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다가 신호가 달라질 조짐이
나타나면 재빨리 투자전략을 바꾸곤 했다.

지난해 11월2일 달러화가 달러당 96엔대로 폭락할 때만 해도 선진국들은
멋진 협조체제를 과시했다.

미국 연준리(FRB)를 비롯한 18개국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외환시장에 개입,
달러 폭락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일 단행된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협조개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시장개입에 동조한 미국과 독일이 그저 시늉만 냈을 따름이라고 평가되면서
협조개입이 오히려 달러 폭락을 부채질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이제 무자비한 투기꾼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선진국 공조체제가 약해진 이유는 간단하다.

각국의 이해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냉전체제하에서는 미국이 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독일등 각국이 자국이익만 따지고 있다.

분데스방크의 경우 지난 수년간 통독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고금리정책과
마르크 강세 정책을 밀어부쳤으며 최근의 달러 폭락에 대해서도 방관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외환시장 협조개입이 실패하자 금리협조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일본이 금리를 내리고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달러 급락이 멎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각국의 경제사정을 무시해야 하는 극약처방이나 다름없다.

달러 폭락을 막기 위해 FRB가 다시 금리를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일곱차례 금리인상을 단행한뒤 이른바 "연착륙"(인플레 없는
안정성장)을 기대하고 있는 미국으로선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금리인상후 경기 호조세가 급격히 꺾이는 "동체착륙"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 개방.컴퓨터거래 보편화.파생금융상품 급성장 등으로 국제금융
시장이 커지면서 시장은 이제 정부도 쥐고 흔드는 폭군으로 군림했다.

정부가 시장을 움직이지 않고 시장이 정책을 좌우하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가령 금융시장에서 FRB가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절대적이라고
하자.

이때 FRB가 대세를 거역하고 금리를 동결하기란 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금리동결이 발표되는 순간 채권시세가 폭락, 장기금리가 폭등하고 달러가
급락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시장의 이같은 "보복"을 피하려면 정부는 많은 경우 시장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20일 멕시코정부는 페소화를 사실상 15% 평가절하하면서 페소
가치가 이 정도 절하된뒤 안정되길 바랬다.

그러나 시장은 정부의 바램을 깔아뭉개고 페소 가치를 40%나 떨어뜨려
버렸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최근 협조개입이 실패한뒤 달러 폭락이 가속화한 것처럼 "정부군"의
위력이 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면 투기꾼들이 더욱 날뛰기 때문이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요즘 "시장을 내버려둬야 한다"는 금융방임주의가
대두하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기능에 맡겨두는게 최선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금융방임의 폐단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이번 국제금융위기를 계기로 각국은 예전과 같이 정부가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안마련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김광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