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어 장생을 구하기는,/백이.숙제만한 사람이 없을 걸./한번 수양산
고사리 먹으니,/만고토록 오히려 사멸되지 않았네" 남명 조식(1501~1572)이
세상사람들에게 명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덕을 닦아 지조를 굳게 할
것을 권유한 이 짧은시 한수에는 그의 도학자다운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남명은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가학을 전수한 그는 기묘사화때 조광조와 함께 숙부 조언경이
희생되는 비극적 체험을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과거급제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은 탓으로 그는
37세가 되도록 예시에만 들었을뿐 본시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끝내 과거를
포기한뒤 일생을 후학양성에 힘쓰며 산임처사로 살았다.

성리학의 이론은 이미 주자에 의해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뿐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는 성리에 대해 고담준론만 일삼는 학자들을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는 "기세도명"으로 몰아붙였다.

남명은 내적 수양에는 "경",외적행위에는 "의"를 내세우는 실천철학을
강조하면서 몸소 실행했다.

방울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을 깨우쳤고 칼을 지니고 다니며 결단을
다짐했다.

명종 선조 광해군연간에 왕이 벼슬을 몇번씩 내려주어도 나가지 않고
시폐를 논하는 상소로 대신했다.

출사를 종용하는 퇴계의 편지를 받고 답장에서 "기세도명"하는 젊은
선비들을 길러낸 것을 책망하기도한 남명은 평생 남에게 고개를 숙인적이
없을 정도로 천길의 벼랑을 깎아 세운듯한 기상을 지닌 일대기사였다.

이같은 학풍때문에 남명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절의지사가 배출됐다.

특히 곽재우 정인홍등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조반정때 대역죄로 죽은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의 비극적 최후는
남명을 퇴계의 그늘속에 묻혀 버리게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만다.

2월이 "남명의 달"로 정해져 그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등 많은 행사들이
열린다고 한다.

"경상좌도는 퇴계,경상우도는 남명","경상도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경상도 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다"는등 경상좌.우도는 예부터 선의의
라이벌의식이 강한 지역이다.

남명과 퇴계의 사후,그들의 뜻과는 전혀 달리 학연이 남인 북인의 붕당을
초래했듯 남명을 재조명하는 기념행사들이 자칫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쪽으로
흘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