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가 유교이므로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거러나 유교란 성격상 종교라기 보다 철학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조선조
초기의 임금들은 불교신앙이 깊었던것 같다.
유교는 죽음의 문제등을 보면 계로가 "죽음이란 무엇입니까?"고 묻자
공자는 "아직 삶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은 알리오(미지생 언지사)"라고
대답하고 있다.
1418년 조선조의 세종이 내불당을 지금의 경복궁자리에 창건하였는데
단종때 집현전과 사헌부 학자들이 철폐를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또 1470년(성종1년)에도 내불당 철폐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강렬한 건의가
있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각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488년(성종 19년)에 원각사가 불타자 성종은 재목과 기와를 내려 중소하게
하였다.
이때 홍문관 부제학 안호등이 억불정책을 들어 명을 거둘것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몇가지 이유를 대면서 받아드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의 특이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우리 헌법 제20조 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고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희생되었던가.
멀리 외국의 역사를 들것도 없이 조선조 후기의 천주교탄압과 순교자의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27일 오후 청와대에서는 이례적인 "행사"가 있었다 한다.
출입기자들에 대통령관리 뒷산에 있는 불상을 공개한 것이다.
청와대가 이 "행사"를 가지게 된 동기는 성수대교붕괴, 충주호유람선 화재
사건등 대형참사가 잇따라 터지면서 시중에 이상한 루머가 나돌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즉 기독교신자인 김영삼대통령이 경내의 불상을 치워버려서 이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이라 한다.
이같은 루머는 우리국민이 종교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여라고 할수 있다.
종교는 현새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다.
참된 종교란 모두 현새의 이익을 기복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개인
또는 공동체의 영혼을 구하고 공동선의 실현에 그 사명을 두고 있다.
성수대교의 붕괴나 충주호유람선의 화재사건은 부실공사와 관리소홀로
일어난 사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 명백하다.
정치가 할 일과 종교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