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각오한 것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직전의 일이었다. 비록 시골에서 올라와 입학했어도 3,4개월동안 각
지역에서온 같은반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다 보니 쫓아갈수 없을 정도로
우열의 차이가 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 영어는 모두가 초심자요,그래서 모두 스타팅라인에 서있는
형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 형편에서 일본인 영어선생이 우리 급우중의 하나를 지목하여 영어를
잘한다고 극구 칭찬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경쟁심에 불을
당기는데 일조를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시골로 내려가 1학년 1학기에 배운 영어를 철저하게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옛말에도 "독서백편의자통"이란 말이 있다. 암송을
완전히 끝내고 어느곳에 어떤 단자가 있으며 그 단자가 어떻게 쓰이고
있다는 것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어학이든 공부할때면 완벽하게
암송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이때부터 터득하였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서 2학기부터는 영어를 잘한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2개반 합쳐 1백명밖에 되지 않고 전교생이 5백명미만의
학교인지라 이 소문은 비교적 빨리 번졌다. 이런 평을 받고보니 이를 계속
유지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겨 선순환을 거듭하면서 줄곧 영어성적은 우수한
편에 속했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대개의 경우 윗학교에 입학지망을 하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마련이었다. 지원하게 될 윗학교도 각자의 장기에 따라
선택되는데 영어가 장기인 한국학생이 찾아야할 학교는 상과계통밖에는
없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경성고상을 선택하고 지원서를
냈다. 경성고상에 입학이 허가된다는 것은 졸업후에 은행 또는 기업체에
취업한다는 것이 예견되는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때의 조그마한 내 자신의 노력이 장래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숙명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것이 내가 오늘날 전문경영인으로서 대접받게
되는 동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한
조그마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장기라고
생각하였던 영어가 나를 경성고상에 입학시켰고 나를 동양맥주에 취업할 수
있게 하였다. 그후에 다른 동료보다 앞서 경영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영어라는 배경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군정 관리하에 있었던 48년
8월 15일까지만 해도 동양맥주경영에 있어 영어는 필수의 어학이었고
미군과의 관계가 원만히 유지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25동란중에는 많은 시간을 영어공부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어란
일조일석에 되는 것도 아니지만 쓰지 않고 가만두면 실력이 후퇴하게
마련이다. 휴전후에는 외국과의 거래가 국가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역시 영어는 동란 이전보다 더 긴요한 통신수단으로
각광을 받게되었다.

외국여행이 거의 불가능하였던 50년대에 외국과의 통신수단은 우편이 주된
것이었다.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정확한 영어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은 영어가 주된 매체가 된
경험이요,그경험을 통해서 나의 영어도 성장해 나왔다고 생각한다.

80년 뜻밖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당시 상공회의소
회장직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는 한국경제를 외국에 알리는 일이었다.
당장 국제상공회의소본부와의 관계를 재정비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전부터 잘 알던 본부 직원들과 교섭,81년 총1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85년 3월에는 국제상공회의소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 할
수 있었다. 이는 대한상공회의소 창립 1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으니 지금 생각하여도 보람이 있었던 노력이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국제상공회의소 본부에서는 82년부터 2년마다 한번씩 국제기업상을
제정해서 시상하기 시작하였다. 개발도상국이라고 해서 자격이 없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시상기준을 검토하여 한국에서는 그 기준에 가장
가깝다고 판단된 대우그룹의 김우중회장을 추천키로 하고 김우중 회장의
양해를 얻었다.

서류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마지막 단계인 운영위원회에 상정되었다.
나는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에 심사에는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사무총장실에서 마음을 죄면서 기다렸다.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만장일치로 김우중회장이 선출되었고 그다음해인
84년 28차 연차총회에서 김회장이 스웨덴 구스타프국왕으로부터
국제상공회의소가 주는 상배를 직접받는것을 보고 우리나라 경영인으로서
큰 자긍심을 느꼈다.

한사람의 전문경영인으로서 국제적으로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어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룹과는 직접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이러한 일들을 할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그룹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