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의 친필이라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찾고,정리 · 번역해 논문을 펴냈다. 자료 앞에선 비굴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았다. 곁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라고들 했다. 그렇게 5년여간 집요하게 다산을 쫓았던 인문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50).

그가 그동안 펴낸 다산 관련 논문 22편을 새로 손봐 한데 엮었다.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756쪽,4만3000원)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민낯의 다산'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1801년부터 1818년까지 강진 유배 시기의 다산이지요. 열두 권으로 간행된 다산시문집에도 없는 자료들이에요. 필터링되지 않은 육성을 통해 '사람 냄새 나는' 다산을 볼 수 있지요. "

강진 유배 때이니까 다산의 나이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다. 제자와 승려,자녀에게 쓴 시와 산문 등으로 당시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복원했다. 그가 그동안 찾아내 확인한 다산의 친필 편지는 150여통.제자 황상에게 준 편지 31통을 모은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혜장과의 교유 내용이 담긴 《견월첩(見月帖)》 등이 망라돼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다산의 '교학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강진에서 다산은 어떻게 훗날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불리는 드림팀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요. "

그는 제자 교육과 관련,다산이 '문심혜두(文心慧竇)'를 중요시했다고 말했다.

"글을 읽을 때 마음으로 느껴서 일어나는 화학작용 같은 게 있잖아요. 공부는 혜두 즉 '슬기구멍'이 뻥 터져야 된다고 믿은 겁니다. 요즘처럼 수학문제 푸는 게 공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지식보다 지혜를,정보보다 식견을 넓혀주는 교육이 돼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

다산의 교육은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제자들의 개성에 따라 맞춤교육을 했다. 문학과 이학으로 나눠 전공을 살려줬다. 일정 수준에 오르면 매일 과제를 줘 기초를 다지게 만들었다. 게으름을 피우면 매섭게 몰아쳤고 잘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답을 통한 강학,즉 토론식 교실로 논리적 사고력을 높여주었다. 각자 역량에 따른 역할 분담 방식도 도입,자신의 성과와 제자들의 성장을 도왔다. 컨베이어벨트처럼 한 바퀴 돌면 책 한 권이 나오는 식이다.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화답했다.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아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낟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이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술집단으로 변했다. 그는 '교육자 다산'만이 아니라 매일 희로애락을 겪고 한탄하는 '범부 다산'도 조명했다. 제자를 외면하고 그 제자가 배신하는 데서 오는 갈등,유배지에서 낳은 딸 홍임 모녀에 얽힌 사연 등을 얘기하며 다산을 더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다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생각이다. "자료를 갖고 있는 분들이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며 협조를 구했다. 그의 원래 관심사는 '18세기 지식인 사회의 변동'이다.

"당시 중국에는 별별 책이 다 나왔어요. 고금도서집성은 한질에 5000권이나 됐지요. 조선의 지식인으로서는 충격일 수밖에요. 요즘 시대의 인터넷 충격과 같았나봐요. 수많은 정보 중 원하는 정보를 뽑아내 편집하는 게 중요했는데 다산이 가장 완벽하게 했던 사람 중 하나였죠.원래 관심을 뒀던 연암 박지원 연구도 계속할 겁니다. 다산이 교과서적인 인물이었다면 연암의 콘텐츠는 파워풀하지요. 지금 읽어도 정신이 번쩍 드는 내용이 많아요. 끝장을 봐야죠."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