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sight] 궈타이밍 대만 훙하이그룹 회장
“궈타이밍(郭台銘) 대만 훙하이(鴻海)그룹 회장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저돌적이다. 만약 당신이 같은 업계에 있다면 당신의 뒤를 그가 쫓고 있다는 걸 항상 의식해야 한다.”

궈 회장에 대해 맥스 팽 전 델 아시아 구매본부장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물넷의 나이에 회사를 세워 ‘세계 전자업계 최대 하도급업체’라 불리는 훙하이그룹(폭스콘)을 일군 것은 여간한 성격으론 어림없다는 얘기였다. 훙하이가 컴팩에 PC 본체를 납품하고 애플 아이폰의 위탁생산업체로 선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앞을 내다본 궈 회장의 안목과 큰 꿈을 갖고 도전해온 저돌적인 성격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그는 올해 66세지만 최근 일본 전자회사 샤프를 인수하는 등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경쟁자를 쫓고 있다.

○해운회사 다니다 스물넷에 창업

궈 회장은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중국 산시성 출신 아버지와 산둥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3형제 중 맏이다. 장제스의 국민당에 가담해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싸웠던 아버지는 1949년 국민당이 패하면서 같이 대만으로 탈출했다.

그는 수도 타이베이의 중국해사전과학교(한국의 해양대에 해당)를 졸업하고 군 복무 후 해운회사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무역업은 상품에 그가 눈을 뜨도록 해줬다. 막 뜨기 시작하던 전자산업도 그의 흥미를 돋웠다.

그가 스물넷이던 1974년 직원 10명으로 훙하이플라스틱을 세웠다. 어머니가 보태준 10만대만달러를 포함해 30만대만달러를 쏟아부었다. 회사는 작았지만 포부는 컸다. 기러기를 뜻하는 ‘훙(鴻)’과 바다를 가리키는 ‘하이(海)’로 회사 이름을 지었다. ‘기러기는 천리를 날고 바다는 백개의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 역사서인 ‘통감절요’에 나온 말이다.

훙하이플라스틱은 TV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했다. 첫 번째 고객은 미국 시카고에 있는 애드머럴TV였다. 이후 RCA와 제니스, 필리스에 부품을 공급했다. 순조로운 듯했지만 ‘오일 쇼크’가 난관이 됐다. 국제 유가가 급등했다. 플라스틱 원가도 치솟았다. 궈 회장은 은행에서 70만대만달러를 빌리며 버텼다. 그는 이 시기를 “한파를 견디던 때”라고 회상했다.

전환점은 1980년 찾아왔다. 미국 게임회사 아타리에 콘솔게임기의 조이스틱과 본체를 연결하는 커넥터를 납품하면서다. ‘아타리 열풍’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아타리의 인기는 대단했다. 훙하이도 하루 1만5000개의 커넥터를 납품했다. 단순 플라스틱 부품에서 벗어나 기술이 필요한 전자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회사 이름도 훙하이정밀공업으로 바꿨다.

○11개월간 미국 돌아다니며 영업

누군가는 궈 회장을 ‘세계 제일의 영업맨’으로 평가한다. 정보기술(IT) 업계에 소문난 그의 저돌적인 성격은 11개월 동안 혼자 미국으로 영업 활동을 떠나면서 유명해졌다. 제품 브랜드를 ‘폭스콘’으로 정한 그는 링컨 타운카를 빌려 타고 미국 전역의 컴퓨터 및 게임기 회사를 찾아다녔다. 사전 약속도 없이 무턱대고 방문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에선 IBM 연구시설과 가까운 모텔에 머물면서 3일 연속 찾아갔다. 어떤 때는 돈을 아끼려 차 뒷좌석에서 쪽잠을 자는 날도 있었다.

당시 PC 및 전자산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싸고 좋은 부품을 빨리 공급받는 것이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됐다. 이를 파악하고 궈 회장은 미국 기업들에 양질의 부품을 누구보다 싸고 빠르게 공급해주겠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필요를 정확히 꿰뚫어본 덕분에 미국 기업들은 잇따라 훙하이에 주문을 내기 시작했다.

궈 회장은 1988년엔 중국 광둥성 선전에 전자제품 조립 공장을 세웠다. 1980년대 대만의 근로자 임금이 오르면서 많은 대만 기업이 해외로 나갔다.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태국 등이 인기 있었고 중국으로 가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도로와 수도 등 사회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대만을 속국으로 보는 중국 정부의 태도도 한몫했다. 하지만 궈 회장은 중국이 세계 조립공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했다. 중국에 유례가 없는 세계 최대 규모로 공장을 지었다. 현재 선전 룽화 지역의 훙하이 공장에선 45만명이 일한다. 기숙사, 직원용 풀장, 자체 소방대, 자체 방송국, 병원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직원용 식당에 쓰이는 계란도 자체 닭농장에서 조달한다.

중국 공장은 훙하이의 폭발적 성장에 발판이 됐다. 어떤 IT 기업이든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하려면 훙하이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1996년 컴팩에 PC 본체를 납품한 것을 시작으로 IBM과 HP 등 당시 내로라하는 PC 제조업체들의 물량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후 애플 아이팟과 아이폰 생산도 맡으면서 일반인은 잘 몰랐던 훙하이(폭스콘)란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팀 쿡 애플 CEO “그와 함께 일해 다행”

훙하이의 성공 요인으로는 고객사의 요구를 어떻게든 해결해주려는 태도도 포함된다. 훙하이는 1998년 높은 인건비를 감수하고 미국에 공장을 세웠다. 최종 소비지와 가까운 곳에 공장을 세워달라는 것이 델의 요구였다. 미국 공장에선 손실이 났지만 이후 델과 더 큰 거래를 하면서 이를 만회하는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애플이 아이폰4의 몸체를 금속으로 만들자고 했을 때도 궈 회장은 큰 결단을 내렸다. 보통의 장비로는 금속 몸체를 제작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산비용이 대단히 높았다. 궈 회장은 일본 공작기계업체 화낙으로부터 대당 2000달러씩 하는 가공기계를 1000여대 주문했다. 다른 회사에선 하나 정도 갖고 있을까 말까 한 비싼 장비였다. 아이폰4는 흥행에 성공했고 훙하이에 대한 애플의 신뢰는 더욱 높아졌다. 팀 쿡 애플 CEO는 “궈 회장은 믿을 만한 파트너며 그와 함께 일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가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순 없다. 전체 직원이 100만명까지 늘어난 가운데 선전공장의 직원들이 연이어 자살하면서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한 임원 회의에서 “인간도 일종의 동물이고 100만명이 넘는 동물을 관리하는 일은 머리 아픈 일”이라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다만 블룸버그는 “2005년 아내가 암으로 죽고, 2007년 동생이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궈 회장이 삶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창 일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하루 16시간을 일하고 삼시세끼를 책상에서 해결하는 일 중독자였다. 지금은 요가도 하고 자선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2008년엔 24세 연하의 발레 무용가와 재혼해 세 자녀를 얻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