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산업 리포트] "무인車로 디트로이트 넘겠다"…오토밸리로 변신하는 실리콘밸리
1908년 헨리 포드는 미국 디트로이트시 하일랜드 파크에 사상 최초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차량 한 대당 제작 시간은 20시간에서 1시간30분으로 줄었다. 자동차 대량 생산과 ‘마이카 시대’의 문을 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세계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해 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2015년 자동차산업의 메카는 디트로이트에서 남서쪽으로 4500㎞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보기술(IT) 중심지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남부 실리콘밸리다. 무인차와 전기차 등이 기존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기술로 무장한 IT 기업들이 속속 자동차산업에 뛰어들고 있어서다. 여기에 기존 자동차 생산 기업들이 관련 기술 확보를 위해 실리콘밸리에 둥지를 틀면서 실리콘밸리는 첨단 자동차산업의 격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IT 기업 vs 자동차 기업

지난 13일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수상한 검은색 미니밴이 나타났다. 차량에 장착된 카메라가 사방을 촬영하는 가운데 미니밴은 시내 곳곳을 누볐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애플의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 ‘타이탄’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애플은 2020년까지 자율 주행 기능이 장착된 전기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애플이 자동차 시장을 다음 타깃으로 삼았다”며 “독보적인 IT 기술력과 1780억달러(약 196조670억원) 규모의 막대한 현금을 투자에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애플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실리콘밸리 연구소에서 2009년부터 도요타 프리우스 등을 개조해 무인자동차를 만들어 이미 시험 주행을 마치는 등 무인차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차량 공유 애플리케이션 업체 우버 역시 로봇 연구로 유명한 미국 카네기멜론대(CMU), 미국 국립로봇기술센터(NREC) 연구진과 협력해 자율주행 자동차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중국 검색 업체 바이두도 올해 초부터 운전자를 위한 인공지능 보조 프로그램이 적용된 무인차 개발에 착수했다. 일본 전자업체 소니는 무인차 개발을 위해 무인 로봇기업 ZMP의 지분을 인수했다.

IT 기업들의 전례 없는 공세에 디트로이트의 전통 자동차 업체들도 실리콘밸리에 뛰어들고 있다. 업계의 판도를 바꿀지도 모르는 첨단 IT·소프트웨어 기술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샌프란시스코 반도와 새너제이를 잇는 225㎞에 달하는 실리콘밸리 지역엔 이미 폭스바겐, 현대자동차, 도요타, BMW 등 자동차 업체들의 연구 센터가 줄줄이 들어서 있다. 미 중부 자동차산업을 대표하는 포드도 지난달 실리콘밸리의 팰러앨토 지역에 직원 125명 규모의 연구센터를 열었다. 이들은 스탠퍼드대 산하 산학협동 자동차 연구소(CARS)와의 협력을 통해 커넥티드 카(connected car), 자율 주행 등의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차세대 자동차 기술 선점 경쟁

IT 기업들의 자동차산업 진출은 갈수록 높아지는 자동차 부품의 전장화(전자장비화) 때문이다.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전기차와 무인차 등의 개발에 따라 2010년 35% 수준인 자동차의 제조원가 대비 전자 부품 비중이 2030년에는 5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IT 기업들에는 자동차산업의 진출 여지가 커지는 것이다. IT 전문 컨설팅업체 가트너의 틸로 코슬로스키 부사장은 “IT를 기반으로 한 기술 혁신이 미래 자동차산업의 핵심 DNA로 자리할 것”이라며 “이 때문에 자동차 업체들은 실리콘밸리로 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쇼인 CES 2015에서 주목받은 무인차 기술이 단적인 예다. 벤츠 아우디 등 전통 자동차 제조사들이 무인차 양산 계획을 발표했지만 관련 기술에서 가장 앞서 있는 곳은 IT 업체인 구글이다. 무인 자동차 제조의 핵심인 자동차 주행 위치 파악, 주변 교통정보 습득 등 핵심 기술이 IT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전기차로 넘어가면 기존 자동차업체들의 경쟁우위는 사실상 허물어진다. 자동차 성능의 핵심인 엔진기술이 전기차에서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LG화학 등 배터리 제조사에서 전기 배터리를 공급받아 여기에 매력적인 디자인 등을 더하면 언제든 기존 자동차 제조사들과 경쟁할 수 있다.

불붙은 인재 쟁탈전

관련 기업들은 사활을 건 인재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블룸버그는 최근 수년간 애플에서 테슬라로 이직한 임직원 수가 150여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애플에서 맥북 등 신제품 개발을 주도했던 더그 필드 부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며 2013년 테슬라로 갔다.

애플도 여기에 맞불을 놓고 있다. 테슬라 임직원 영입을 위해 연봉 60% 인상과 25만달러(약 2억7000만원) 상당의 보너스를 내걸었다. 기존 자동차업체에서도 인력을 빼 오고 있다. 애플은 지난해 독일 자동차 회사 메르세데스벤츠의 연구개발(R&D) 책임자인 요한 융비르트를 영입했다. 최근에는 아이팟 등을 개발한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 조니 아이브가 직접 자동차 분야 고위 임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술 경쟁이 가열되고 있지만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코슬로스키 부사장은 “자동차 업계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기술 혁신에 지나치게 몰두해 소비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정관 KB투자증권 연구원은 “2~3년 내에 완벽한 무인차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교통 당국의 안전성 검증이 이뤄지려면 추가로 3~5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완성차 제작 경험이 없는 IT 기업이 업계 판도를 바꾸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