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 전문점 고상, 소박한 연잎밥과 정갈한 오색잡채…마음을 채워주는 한끼
승려들이 먹는 밍밍한 ‘절밥’으로 여겨지던 사찰 음식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자극적인 식재료와 고기를 쓰지 않는 사찰음식이 나눔과 비움의 철학을 담은 ‘힐링 푸드’로 재조명받고 있다.

서울 수하동 미래에셋센터원빌딩 지하 2층에 있는 ‘고상’은 고급스러운 사찰음식을 코스 형태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상의 요리는 불교인들이 운영하는 정통 사찰음식 전문점과는 다소 다르다. 오신채(五辛菜·마늘 파 부추 달래 무릇)와 고기를 넣지 않는 등 기본 원칙은 지키되, 호불호가 갈리는 사찰음식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맛과 조리법은 현대적으로 바꿨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배흘림기둥이 눈길을 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도 등재된 인간문화재 최기영 대목장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본떠 만든 것이다.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결의 벽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프라이빗 룸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리에 앉으면 심심함을 달래줄 주전부리로 ‘LA찰떡’이 나온다. 미국 동포들이 찹쌀과 검정깨를 버무려 오븐에 구워 먹은 데서 유래한 음식이다. 이어 등장하는 ‘건강죽’은 흔히 나오는 호박이나 팥 대신 산나물, 우엉, 버섯, 마 등을 활용해 매일 종류가 바뀐다.

오색연꽃
오색연꽃
본격적인 코스가 시작되자 먹는 즐거움과 보는 재미를 함께 살린 요리들이 나왔다. ‘오색연꽃 연잎우엉잡채’부터 눈길을 끌었다.

한 접시엔 우엉만 넣어 볶은 당면이 연잎에 덮여 있고, 다른 한 접시엔 백년초에 절여 보랏빛을 낸 연근과 샛노란 파프리카, 푸른 빛깔의 오이, 하얀 무채 등이 꽃잎 위에 놓여 있다. 이들 채소를 당면에 올려 버무리면 오방색(五方色)을 뽐내는 잡채가 완성된다.

콩고기를 유부로 감싼 ‘삼성단’은 복주머니를 닮았다. 조청을 살짝 섞은 우엉소스에 찍어 먹으면 달달하면서도 든든하다. 전분을 빼낸 생감자를 국수처럼 얇게 뽑아내 검정깨소스에 섞어 먹는 ‘감자국수’, 잘게 찢은 더덕을 잣소스로 무친 ‘더덕잣무침’은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게 한다. 식감도 아삭하고 상큼해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다.

연잎밥
연잎밥
사찰음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연잎밥 차례다. 다소곳이 접혀 있는 연잎을 펴자 특유의 진한 향이 확 올라왔다. “고운 연잎 향기에서 농염한 여자가 아닌 청순한 아낙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송수미 대표의 설명이 재미있다.

송 대표는 “전북 무안에서 공수한 최상의 연잎만을 쓴다”며 “우리 연잎밥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했다. 실제 먹어 보니 그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맛이다. 함께 나오는 된장찌개도 진국이다. 고기를 전혀 넣지 않았지만 기름기가 돈다. 육수를 대신해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진하게 우려낸 채수(菜水)를 써 끓였다고 송 대표는 설명했다.

연잎우엉잡채
연잎우엉잡채
고상은 웬만한 프랑스 정찬 못지 않은 높은 가격에도 정갈한 맛과 안락한 분위기 덕에 정·관·재계 유명 인사들의 비즈니스 미팅 장소로 인기가 있다.

법륜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뿐 아니라 염수정 추기경을 포함한 천주교 인사, 유명 개신교 목사들도 이곳에서 식사를 즐겼고 중동에서 온 무슬림 단골도 적지 않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은 종교의 벽도 허무는 모양이다.

■ 송수미 대표 “아들 아토피 때문에 채식 … 외국인도 반해”

사찰음식 전문점 고상, 소박한 연잎밥과 정갈한 오색잡채…마음을 채워주는 한끼
“단순히 밥을 먹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담은 갤러리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음식의 데코레이션과 인테리어에도 공을 많이 들였죠.”

고상을 운영하는 송수미 대표(사진)는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뒤 오랫동안 인테리어 사업을 했다.

매장 곳곳에서 그의 전공이 발휘된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엿볼 수 있다. 이곳에는 제각각 콘셉트가 다른 총 열한 개의 룸이 있다. 어떤 방에는 직선 구조의 남성적인 인테리어를 채택하고, 또 다른 방에서는 곡선 구조의 여성적인 인테리어를 강조하는 식이다.

송 대표는 신혼 시절에는 ‘삼층밥’을 지을 정도로 요리에 별 재주가 없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사찰음식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아들이 아토피로 고생하면서다.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들이 심한 아토피로 너무 힘들어 했어요. 수십년간 유지해온 식생활을 버리고 완전한 채식을 하면서 자연식 음식에 눈을 떴습니다.” 그는 건강한 식재료를 연구하고, 아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레시피를 개발하면서 사찰음식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송 대표는 “종교적 이유나 채식주의 등으로 입맛이 까다로운 외국인들도 저희 음식은 다들 좋아한다”고 말했다. 작년 가을에는 한국에 출장 와 고상에 들었다가 이곳 음식에 매료된 한 인도 기업인의 요청을 받고 직접 인도로 날아가 출장요리(catering) 서비스를 제공한 적도 있다. 이 기업인은 송 대표에게 “올 가을에도 또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위치
서울 중구 수하동 67 미래에셋센터원빌딩 지하 2층 (02)6030-8955

■ 메뉴
코스 요리 4만2900~16만5000원
세트 메뉴 1만9800~3만1900원 (홀에서만 주문 가능)

■ 영업시간
아침 오전 7~10시
점심 오전 11시30분~오후 3시
저녁 오후 5시30분~10시(평일)
오후 5시30분~9시(일요일·공휴일)

글=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