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야스쿠니, 소년병들의 편지
야스쿠니 신사의 널찍한 뒤뜰로 들어서니 소담한 여름 풀꽃들이 피어 있는 사이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소년 병사들의 편지들이 비목에 새겨져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부모에게, 고향의 친구들에게, 그리운 소녀들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까까머리 소년들은 알지도 못하던 남양의 군도와 밀림 속에서 일왕을 위한 죽음의 전투에 동원됐다. “안녕, 엄마!…”로 시작되는 편지들은 종종 “당분간 편지를 못 보낼지도 몰라…우리는 내일 이곳을 떠나야해”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 고즈넉한 공간에서 전쟁과 평화의 콘트라스트에 전율하게 된다.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제목의 자그마한 책자에는 가미카제에 동원된 대학생 파일럿들이 마지막 출격을 앞두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낸 눈물의 편지들이 실려 있다. 전도가 양양한 청춘들은 그렇게 벚꽃처럼 바람에 스러졌다. 이 편지들 역시 야스쿠니의 비목들처럼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모두가 꽃다운 젊음이었다. 그들은 결국 군국주의 광기에 희생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죽고 나면 충신도 역적도 없다고 생각한다. 야스쿠니는 국가 아닌 자연인들의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아베는 굳이 그 논리 뒤에 숨어 전쟁범죄를 합리화하고 있다. 신도(神道)를 믿는 보통의 일본인에게라면 길흉화복은 귀신의 장난이다. 그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른 점이다. 이런 종교관이라면 도덕의 근원과 양심의 귀책을 묻기 어렵다. 그래서 범죄 책임의식이 이다지도 약한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아베는 바로 그것에 기대어 야스쿠니를 얼버무리고, 전쟁책임을 지워버리고, 식민지배를 희석시키며, 국가에 의한 성폭력을 희미한 기억으로만 치환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는 올해도 야스쿠니에 공물을 바쳤다. 그런 행동이 계속된다면 일본인의 부도덕성과 그 부도덕의 방패로 삼고 있는 일본적 특수성과 신토이즘에까지 폄훼, 비난의 화살이 날아가 닿을 것이다. 그렇게 아베는 야스쿠니를 능멸하고 있다. 일본 지도층의 몸에 밴 위선도 더는 옹호될 수 없다. 일왕에 대한 비난만 나오면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며 엄숙해지는 그들의 위선은 구역질이 난다. 위선도 교육된다. 그러나 일본적 특수성을 용납해주는 타자의 포용도 ‘정도껏’이라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렇게 올해도 어김없이 8·15가 다가왔다. 한국엔 광복일이요, 일본의 패전일이며, 미국의 승전일이 바로 3일 후다. 그렇게 집단기억의 투쟁에 바쳐지는 날이다. 집단기억을 향한 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 중국 일본 한국이 저마다 민족주의적 열정에 불을 지핀다. 각국의 포퓰리즘은 필시 경쟁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진땀 흐르는 여름은 반복된다.

8·15의 지정학을 다시 들여다 보면 아시아적 열등성 같은 것이 느껴진다. 덩치를 자랑하고 싶어 조바심을 치면서 한국에 치근대는 중국도 그렇지만, 비정상으로 달려가면서 기어이 정상국가의 간판을 달려는 일본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적 특수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정상국가를 언급하는 것은 언어의 혼란이요 개념의 불일치다. 오히려 일본인에게 8·15는 전체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한 자유의 기념일이기를 바란다. 일왕이 현인신이 아니라 맥아더 곁에 선 자그마한 노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그런 날이었다. 신국이 아니라 보통의 국가라는 것을 일본인들이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한국이 일본을 정상국가라고 인정해주나.

한국도 8·15 광복에서 나아가 8·15를 건국일로 기념하는 역사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건국일 8·15에 와서야 비로소 근대 한국인이 태어났다. 한국인은 광복에서 건국으로 이어지는 치열한 갈등과 건설의 기간을 온전히 하나로 기억함으로써만 비로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번 8·15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이 그 새로운 출발이기를 바란다. 아베 총리도 군국주의 일본이 아닌 자유로운 일본의 재탄생으로서 8·15를 기념해달라. 그 지점에서 일본도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놓여난다. 야스쿠니 소년병들의 영혼도 그래야 잠들지 않겠는가.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