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꿉꿉한 사무실, 누가 걸레 널었어?…알고보니 단벌신사 김차장 냄새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하는 40대 초반 노총각 김 차장은 장마철만 되면 사내에서 기피대상 1호가 된다. 옷과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탓이다. 홀로 자취하는 그는 여름 양복이 한 벌뿐인 ‘단벌신사’. 잦은 회식으로 찌든 양복에 장마철 습기가 더해진 냄새는 주변 동료들에겐 참긴 힘든 고통이다. 여간해서는 직원들이 김 차장 주변에 가는 것을 꺼릴 정도다.

며칠 전에도 비에 젖은 양복을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채 출근한 김 차장. 보다 못한 이 대리가 용기를 내 조심스레 말했다. “차장님, 양복에서 냄새가 너무…. 드라이클리닝을 하시거나 한 벌 더 장만하시죠.” 김 차장은 그제야 동료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날 바로 양복 몇 벌과 향수를 샀습니다.”

직장인들에겐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운 여름 날씨뿐 아니라 습하고 축축한 장마철 역시 또 다른 시련의 시기다. 환기가 잘되지 않는 사무실엔 높은 습도로 불쾌지수까지 높아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덥고 습한 장마철을 힘겹게 보내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모습은 어떨까.

◆구내식당 바글바글…점심 먹기 힘들어

대기업 A사에서 일하는 김 대리는 요즘 점심시간에 길게 줄을 설 생각만 하면 짜증부터 난다. 이 회사는 상반기 경영실적이 경쟁사보다 저조하자 점심시간(낮 12~오후 1시)을 철저히 준수하라는 업무강화 지침을 내렸다. 예전엔 오전 11시45분께 점심을 먹으러 나갔지만 요샌 상사 눈치 때문에 12시 정각이 돼야 자리를 뜰 수 있다.

문제는 장마철이 되자 대부분의 직원이 밖으로 나가기보다 구내식당을 찾는다는 것. 낮 12시가 넘으면 직원들이 구내식당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100m가량 길게 줄을 서는 일이 많다. 대기 시간이 평소에 비해 두 배는 더 걸린다. “외부 식당을 이용할까 생각도 했지만 오가면서 비에 젖는 게 싫고 나가는 것도 귀찮더라고요.”

증권사에 근무하는 조 과장은 장마철만 되면 동료들과 함께 휴게실에서 음식을 시켜먹는 게 습관이 됐다. 처음에는 중국음식집에서 짜장면 탕수육 등을 시켜 먹고 분식집에서 된장찌개도 배달시켰다. 하지만 사무실은 물론 영업장에까지 된장과 고추장 냄새가 진동한다는 항의가 빗발쳐 메뉴를 바꿨다. 냄새가 덜 나는 김밥과 샌드위치를 번갈아 시켜먹기로 한 것. 조 과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김밥과 샌드위치만 먹다 보니 장마가 끝나면 이런 음식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고 했다.

◆비만 오면 술판 벌이는 그분들 때문에…

중견기업 B사에서 일하는 최 대리는 비만 오면 술 마시자고 불러내는 이 차장 때문에 장마철이 무섭다. 사내에서 소문난 ‘주당(酒黨)’ 중 한 명인 이 차장은 비 오는 날에 술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지는 ‘낭만파’이기도 하다.

그와 일하는 직원들은 퇴근 무렵 없던 약속까지 만들어 도망치기 일쑤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어쩌다 이 차장한테 걸리면 새벽 귀가를 각오해야 한다. 내리는 비를 보며 “분위기가 딱”이라며 2, 3차를 외쳐대는 탓이다. 여기에 2, 3차로 간 노래방에서도 비와 관련된 슬픈 노래를 연달아 불러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 애창곡인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이어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사람’으로 시작하는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로 시작하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까지 3단 콤보가 흘러나온다. “비 오는 날에는 택시 잡기도 어렵고 대리기사를 불러도 늦게 오기 때문에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이 차장 때문에라도 장마철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대기업 C사 직원인 문 대리는 비만 오면 감정이 복받친다는 같은 팀 동료 강 대리 때문에 장맛비가 싫기만 하다. 몇 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강 대리는 비만 오면 절친한 동료인 문 대리에게 술 한잔하자고 졸라댄다. 술자리를 마다한 적이 없는 문 대리도 ‘비 오는 날의 강 대리’는 부담스럽다.

강 대리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예전 여자친구 얘기만 지겹게 하다가 나중엔 눈물까지 펑펑 쏟는다. 만취한 강씨를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 것도 문 대리의 몫. 이런 술자리도 한두 번이지 몇 차례 계속되면 애주가인 문 대리도 짜증 날 수밖에 없다. “이번 장마철은 어느 때보다 비가 더 자주 온다는데…. 걱정입니다.”

◆장화에 슬리퍼에 … 눈총받는 패션

대기업 D사 기획팀의 김 부장은 비 오는 날이면 젊은 남녀 직원들의 옷차림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다. 최근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라는 ‘크록스’ 샌들은 남자 직원들에겐 비가 오면 필수 아이템이 됐다. 김 부장 눈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이 샌들이 집 근처를 산책할 때나 신는 슬리퍼처럼 보이지만, 젊은 직원들은 출근할 때도 거리낌 없이 신는다.

짧은 하의에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여직원들의 패션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뭐라고 한마디 했다가 젊은 직원들에게 ‘노땅’이라고 찍힐까 봐 대놓고 말할 수도 없다. “출근할 때는 샌들이나 장화를 신더라도 사무실에선 좀 벗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다 이놈의 비가 문제네요.”

정부서울청사에 있는 E부처.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눅눅한 사무실 환경 탓에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무실 안이 습하고 축축한데도 정부의 냉방온도 제한 정책 때문에 에어컨을 틀 수 없다.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상사들의 짜증도 덩달아 늘어난다는 게 직원들의 푸념이다. 평소엔 보고서와 결재 서류가 큰 지적 없이 넘어가는 일이 많았지만 장마철엔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땐 비가 원망스럽다. “절전에 앞장서는 게 공무원들의 당연한 자세겠지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무슨 극기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짜증 나지 않게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 줘야 하지 않나요.”

강경민/전설리/전예진/황정수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