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너희가 이스라엘을 믿느냐"
박근혜 정부가 정책 슬로건으로 내건 ‘창조경제’의 의미를 놓고 곳곳에서 ‘뜻풀이 학예회’ 소동이 벌어졌다. 핵심 공직자들 사이에서까지 정확한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이 빚어지자, 급기야 박 대통령이 “창의성을 우리 경제의 핵심가치로 두며…”로 시작하는 ‘유권해석’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산업과 산업,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창조경제의 모델국가로 알려진 이스라엘에 대한 학습열기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긍정적 의미의) 뻔뻔함, 당돌함’이라는 뜻을 가진 ‘후츠파(chutzpha)’ 정신과 창업 초기의 기업을 민·관 합동으로 지원하는 ‘요즈마(Yozma) 펀드’를 통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벤처강국으로 거듭났다는 게 정설(定說)이다.

‘창조경제’ 억눌렀던 키부츠

그게 다일까. 조금 더 탐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태인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갖은 고생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맨손으로 수천년 전의 고토(故土)로 돌아온 유태인들에게는 당장의 주거안정과 생계수단 확보가 시급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똑같이 일하고, 공평하게 나눠갖는다’는 사회주의 집단공동체, 키부츠(Kibbutz)였다.

키부츠는 이스라엘이 빠르게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순식간에 257곳이 조성됐고, 수십만명이 모여 살며 농축산물과 가공식품, 기계 등을 생산했다. 키부츠 구성원들은 철저하게 집단 노동을 했고, 수익을 고르게 나눠 가졌다. 음식도 공동식당에서 똑같은 것을 먹었고, 생활필수품도 공동구매를 통해 균일하게 분배했다.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슬로건인 ‘경제민주화’로 따지자면, 이만큼 완벽한 모델이 있을 수 없다. 생산과 분배 및 생활의 전 과정에서 개인주의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주의 공동체, ‘경제민주화 공동체’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었다. 개성과 창의성의 발목을 잡힌 젊은이들이 줄줄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주민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전체 키부츠의 절반이 파산상태에 빠졌다.

융합의 원동력, 다문화주의

몰(沒)개성의 울타리를 빠져나온 젊은이들은 억눌렸던 ‘후츠파’를 적극적인 창업을 통해 마구 분출했고,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이 ‘요즈마’다. 그런 시스템을 적극 벤치마크해 ‘창의적 벤처기업 생태계’를 일궈내겠다는 한국 정부가 다른 한편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교조적 집착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 걱정스런 이유다.

다양성과 창의성이 만개(滿開)한 이스라엘의 경제 생태계를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인종적 다양성이다. 이스라엘에서 ‘유태인’으로 인정받아 정착지원금이 주어지는 해외로부터의 이주민은 온갖 피부색의 인종이 다 포함돼 있다. 중·동부 유럽에 거주했던, 백인들과 거의 똑같은 외모의 ‘아슈케나지’, 북부아프리카와 중동 일대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가무잡잡한 피부의 ‘스파라디’, 에티오피아에서 수천년간 살아온 완벽한 흑인 외모의 ‘팔라샤’, 인도 동부지방에서 건너온 벵골계에 이르기까지 ‘인종 용광로’를 방불케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먼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 조상이 유태인이었고, 유태교 신앙과 문화를 지켜온 집단이면 피부색과 인종에 관계없이 유태인으로 인정하고 과감하게 포용했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위기 속에서도 이주 외국인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살펴봐야 할 또 하나의 ‘이스라엘 텍스트’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