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4·11 총선도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 후보자나 정당의 득표율로는 과거에 비해 누그러졌지만, 결과로는 예전보다 더 심해진 꼴이다. 이대로 간다면 8개월 뒤 벌어질 대선에서도 영락없이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지역감정은 어디서 온 것인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한국의 지역감정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다. 세계에는 한국보다 지역감정의 역사가 오래 된 나라가 많다. 영국의 지역감정은 한국과 비교가 안 된다. 영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21년으로 국호조차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 이탈리아는 1870년대에 통일됐는데, 남북이 인종까지 다르다. 미국도 짧은 역사지만 전쟁까지 치른 남부와 북부 간에 감정이 좋지 않다. 반면 한국은 7세기 이래 통일을 유지하면서 이들 나라에 비해 지역감정이 없다시피 했다.

한국의 지역감정은 최근 수십년 간 새로 만들어진 측면이 강하다. 그 계기는 아무래도 1960~1970년대 ‘개발국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개발국가 시대에는 정부가 금융 재정 규제 등 당근과 채찍을 모두 들고 있었다. 당연히 민간에서도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것, 즉 정경유착이 모든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그러면서 정통성이 약한 군사정부가 정치에 지역감정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정지역 출신이 ‘해 먹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한국 선거에서 지역감정이 계속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정경유착 구도가 다 해소되지 않은 채로 정치가 민주화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선거가 바로 정경유착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이권’을 놓고 겨루는 장(場)이 되었고, 지역감정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정권에 따라 특정 지역 출신의 급격한 부침(浮沈)이 일어난다. 선진국에서도 정권에 따라 지역의 명암이 갈리곤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카터 정부 때는 조지아 사단이, 클린턴 정부 때는 아칸소 부대가, 부시 정부 때는 텍사스 마피아가 연방정부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정부의 요직이 바뀔 뿐 아니라, 공기업 금융회사 민간기업 언론계, 심지어 학계에서까지 출신 지역에 따라 명암이 갈린다. 그런 구도 아래에서 선거에 이긴 지역 출신은 형님 아우로 엮여서 몇 년간 잘 ‘해 먹는’ 반면, 진 지역 출신은 찬밥 신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정권과 무관하게 인사와 법을 공정하게 운용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정경유착의 토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힘이 민간 경제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관치(官治)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

최근 한국은 국가의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고 하면 영락없이 ‘신자유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에서 20세기에 성립한 복지국가와 규제의 체계를 허물자는 생각이다. 복지국가를 허물자는 이야기는 복지국가가 성립한 적도 없는 한국에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규제의 경우도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새로 도입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한국에서 정경유착과 관치경제를 청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서양이 18~19세기에 당면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과제와 같은 것이다. 당시 서양은 16~17세기 중상주의(重商主義) 아래에서 성립한 강력한 국가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과제였다. 지금 한국도 1960~1970년대 ‘신중상주의’ 개발국가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지역감정과 선거가 얽혀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총선보다 대선이 훨씬 더 큰 이벤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 대선의 전초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선에서 또다시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게 해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궁극적 책임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다. 대선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겨서 무엇을 하는 것이 목표라면, 지금 인사와 법을 공정하게 운용할 방안과 함께 정경유착 관치사회를 청산하기 위한 비전을 보여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망국적 지역감정이 정치를 좌우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