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파란 하늘에 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만 보면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고교시절 파일럿이 되고 싶어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려 했지만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소독약 냄새 가득한 수술실에서 청춘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대학병원 원장이 돼 있었다. 책임이 큰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가슴 속에 담아놓은 꿈의 실현을 더 늦췄다가는 영영 창공과 인연을 맺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김연일 순천향대학교병원 정형외과 교수(64)는 2000년 10월 비행 스쿨에 들어갔다. 당시 나이 56세.수소문 끝에 초경량 비행기 교육장을 찾아갔다.

8년이 흐른 지금 총 300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자랑한다. 10년차 초경량 항공스포츠 마니아들의 평균 비행 누계가 150~200시간인 것에 비하면 단기간에 월등히 많은 시간을 하늘에서 살았다. 입문 후 초기 몇 년간,토요일과 일요일을 안산과 화성의 비행장에서 살다시피 한 결과다. 지금도 매주 하루는 비행장에서 젊은 동호인과 어울려야 직성이 풀린다.

"하늘은 3차원이니까 비행기 조종은 자동차 운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죠.한마디로 자유입니다.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안으면 진료실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확 씻겨져 나갑니다. 비행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군살이 찔 틈도 없죠.중독성도 생겨요. 매주 한 번 이상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

김 교수는 통상 한두 기종만 조종하는 마니아들과는 달리 자비루(호주산 고익기),펄사(미국산 저익기),에어크리에이션(프랑스산 체중이동 초경량기),에어커맨드(미국산 자이로콥터) 등 다양한 기종을 섭렵해 동호회원들로부터 비행 감각을 타고났다는 평을 듣는다. 한 번도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담도 크다. "후배 의사들에게 항공 스포츠를 권하지만 위험하다며 꽁무니를 빼죠.내가 배짱이 세긴 센가 봐요. 하지만 비행기는 기본 수칙만 지키면 안전해요. 초보자들이 자신의 기량과 비행기 성능을 고려치 않고 위험한 비행을 하니까 사고가 생기죠."

그는 다만 2001년 9월의 첫 단독 비행은 조금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교관이 갑자기 내리더니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더군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습니다. 비행 교육에서 첫 솔로 비행은 절대 예고하지 않습니다. 밤잠을 설치고 긴장한 끝에 실수할까 봐서요. 막상 두 사람이 타다가 한 사람이 빠지니 가벼워서 잘 뜨더군요.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한 번 솔로 비행한 이후에는 주로 혼자 타게 되지요. "

초경량 항공 스포츠는 225㎏이 넘지 않는 기체를 타고 1㎞가 채 못 되는 활주로를 이.착륙하는 모험심이 필요하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듯 비행은 이륙과 착륙이 위험하다. 이륙시 충분한 양력(揚力)을 받지 못하면 기체가 지상에 처박혀 대형 사고가 나게 된다. 활주로가 짧기 때문에 중력 가속도의 2배가 넘는 속도로 내리면 사람이 다치거나 부품에 금이 가 못쓰게 된다. 그래서 철저한 비행 교육과 기체 정비가 필수적이다. "요즘 항공 마니아들이 늘면서 사고가 나자 정부 당국이 관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격납고 설치나 활주로 확충을 막고 있습니다. 격납고만 있어도 날개나 부품들이 비바람에 노출되지 않아 사고 위험이 훨씬 줄어드는데 정부는 규제만 강화해 항공스포츠 마니아의 기를 꺾고 있어요. 비행기 한 대 값은 800만~3000만원이지만 한 시간 나는 데 고급 휘발유 14ℓ면 족합니다. 알고 보면 골프보다 값싸죠.젊은이의 기를 살리고 항공산업 발전에 기초가 되는 초경량 항공기 스포츠를 위한 전향적인 정책이 나와야 합니다. "

그는 호기심이 많고 운동 감각이 뛰어난 편이어서 항공스포츠 말고도 사진 골프 색소폰에서도 '달인'의 수준이다. "의학은 난해한 학문이자 환자와의 사투죠.의학에만 매달리면 한 쪽 날개가 기울어져 편협하기 쉬운데 다양한 체험을 다른 쪽 날개에 얹으면 양쪽 날개가 균형을 잡아 인간적인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런 저런 취미 생활을 하는 이유죠."김 교수는 "올해 89세인 아버님이 진지를 잘 드시고 정정하시다"며 "부친을 닮는다면 영화 '007'의 1인승 전투 헬리콥터를 제작했던 켄 월리스처럼 90세의 나이에도 자이로콥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글=정종호 기자(화성)/사진=김영우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