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풀씨 하나를 위하여, 정하선
풀씨 하나를 위하여


정하선

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저 작은
풀씨 하나를
흙에다 떨어뜨려놓고
신은 매일매일 아침마다
이슬 내려
맑은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태헌의 한역]
爲一草子(위일초자)

猗歟此何非所重(의여차하비소중)
落地彼小一草子(낙지피소일초자)
天神日日待朝旦(천신일일대조단)
手降露珠祈淸祉(수강로주기청지)

[주석]
*爲(위) : ~을 위하여. / 一草子(일초자) : 하나의 풀씨, 풀씨 하나.
猗歟(의여) : 아아! 이 감탄사는 역자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此何非(차하비) : 이것이 어찌 ~이 아니겠느냐, 이 어찌 ~이 아니랴! / 所重(소중) : 소중하다, 소중한 것.
落地(낙지) : ~이 땅에 떨어지다, ~을 땅에 떨어뜨리다. / 彼小(피소) : 저 작은, 저토록 작은.
天神(천신) : 신. 원시의 “신”을 역자가 한역한 말로 하늘 자체 또는 하늘을 관장한다는 신을 뜻한다. / 日日(일일) : 매일매일, 날마다. / 待(대) : ~을 기다리다. / 朝旦(조단) : 아침.
手(수) : 손수, 직접.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降(강) : ~을 내려주다, ~을 하사하다. / 露珠(노주) : 이슬, 이슬방울. 이슬을 시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 祈(기) : ~을 빌다, ~을 기도하다. / 淸祉(청지) : 맑은 복.

[직역]
풀씨 하나를 위하여

아아! 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땅에 떨어뜨려놓은
저 작은 풀씨 하나!
신은 매일매일
아침을 기다렸다가
손수 이슬 내려
맑은 복을 빌었을 거다

[한역 노트]
이 시는 “이 어찌”의 “이”와 “신”에 대한 이해가 시의 대의를 파악하는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자가 보기에 시인이 언급한 “이”는, 신이 작은 풀씨 하나를 세상에 보내놓고 이슬을 내려 도와주고 기도하는 것까지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시인이 언급한 “신”은 서양의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절대자가 되고, 동양의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하늘[天]이나 도(道)가 될 것이다. ‘하늘’과 ‘도’가 시인이 언급한 “신”과 그 함의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아래의 예문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따로 거론하지는 않기로 한다.
하늘은 복록(福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 - ≪명심보감(明心寶鑑)≫
<도(道)는> 만물을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이룩되게 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자라나게 하고도 지배하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 ≪노자(老子)≫

그런데 신이 그 작은 풀씨 하나를 흙에 떨어뜨려놓고 이슬을 내려 도와주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필시 그 풀씨가 앞으로 제 역할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뿌린 것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할까?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사람들이 추구해온 진리가 천상의 이데아(Idea)를 지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응당 신의 태도나 자세도 배워야 할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는 “신”의 태도 내지 자세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고 알아야 할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싶다.

사소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신의 배려가 이 사소한 것에까지 섬세하게 미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작지만 소중한 것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 시로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만물을 신이 가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신의 정원(庭園)이 된다. 같은 논리로 세상은 또 ‘하늘’의 뜻이 체현되고, ‘도’가 작동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만물에 대한 신의 눈금은 다를 리가 없을 것이다. 풀씨 하나를 위한 신의 마음씀이 그러하다면, 사람에 대한 마음씀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언제나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나인 ‘타인’의 존재 가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존재의 이유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도 있고, 그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무례를 넘어 신에 대한 불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우리가 신의 정원에서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리라.

역자는 연 구분 없이 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4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시의 제2구는 원시의 3~5행을 한역한 것인데, 한역시 자체만 놓고 따져볼 때 제3구와 제4구를 이끈다기보다 제1구에 부연된 시구로 이해된다. 이 때문에 제3구 부분의 직역을 부득이 원시와는 다소 다른 화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시인이 언급한 “이”것의 범주가 축소되게 하고 말았다. 이 점은 역자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지만, 시인에게 결례를 범한 것은 틀림없다. 이 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역시 제2구의 생략된 주어가 제3구의 주어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시 6행의 “아침마다”를 “아침을 기다렸다가[待朝旦]”로 의역하였으며, 원시 8행의 “맑은 기도”를 “맑은 복[淸祉]”을 비는 것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짝수 구에 압운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子(자)’와 ‘祉(지)’이다.

2021. 5. 18.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