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노릇 주인노릇 – 자본주의시대의 계약관계를 생각하며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가고 새 꽃이 핀 듯하더니, 어느덧 곡우도 지나고 이제 봄날이 진다. 한달전쯤에는 기러기들이 북쪽하늘로 떼지어 돌아가더니, 이제 며칠이 지나면 초여름, 신년도 1/3이 갔다. 길가에는 연등이 걸리기 시작한다. 청명 한식에는 움츠졌던 어깨가 좀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면, 곡우 때는 내리는 빗물에 씻긴 화사한 꽃길을 밟고 이제 볍씨도 담그고 본격적인 농사채비를 하는 절기이다.

어저께 모종단에서 발표한 부처님오신날 법어중에 “거지노릇 그만하고 주인노릇 좀 해라”는 말이 눈에 띄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거지노릇이란 무엇이고 주인노릇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까막히 잊고있었던 어릴 적 떼지어 동냥 다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기가 좋아진걸까? 지금 세상은 이런 거지는 없어졌다. 그러나 이른 아침마다 驛舍 한 귀퉁이에 쪼그려 선잠자는 노숙자들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냉혹한 모습을 본다.

아무튼 정신없이 이리저리 내달리듯 살아온 필자에게는 ‘거지’란 말이 가슴에 닿았다. 안창호는 주인의식을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의 토대로 삼았고 함석헌은 각성된 민중의 주인의식을 씨알이란 말로 개념화하면서 반독재운동을 전개했지만, 대체 지금의 주인은 누구이고 거지는 누구란 말인가?

주인은 아량을 베풀고 용서를 해주지만 거지는 아량과 용서를 구걸한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거지가 無明에 가리고 貪嗔痴에 시달리며 떠도는 고통의 유랑자라면 주인은 自性을 깨달은 여유있는 주인공일 것이다. 서양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인은 베푸는 불변의 주체이고 거지는 베품을 받는 우연적인 객체라 할 것이요,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주인은 恒産과 恒心을 가진 군자이거나 養生의 비결을 얻은 至人이고, 거지는 坐馳의 癡心을 가진 소인배이겠다.

예나 지금이나 주인노릇하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근자에는 甲과 乙이란 슬픈 일방적 계약관계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더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같은 서민들은 글로벌화된 권력과 재벌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거대사회의 미세부분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거지노릇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고, 또 계약의 주체라고 해서 주인이 되는 것만도 아니다. 만일 부당하게 갑이 을을 착취하려한다면 오히려 갑을 거지라 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모 재벌의 젊은 총수가 매값을 주고 돈없고 힘없는 노동자를 공개리에 폭행한 계약행위가 공개되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본인은 매값보다 훨씬 덜맞았으며 갑과 을간의 정당한 계약행위였다고 항변했지만, 사회적 비난과 형사처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도 자신의 아들이 맞았다고해서 아버지가 대신 때려주고 엄청난 합의금을 준 재벌총수도 있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대학생이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놀러다니다가 종업원과 싸움질을 한 것이었는데, 아들이 얻어맞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조폭까지 동원해서 납치해다가 폭행하고 돈으로 입막음하려한 것으로 발전했다. 당시 이 사건은 아버지의 눈물겨운 자식사랑에 끝나지 않고, 놀랍게도 -우리같은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계 조폭 경찰 검찰 정치권간의 검은 거래와 배신배임, 구조적 비리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온갖 추한 모습을 다 드러낸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렇게 돈을 주고 을을 폭행한 갑의 행위가 주인노릇일까? 그들은 거지만도 못한 돈의 노예이거나 사회를 좀먹는 도적떼들일 뿐이다. 지금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분수에 넘친 한때일 뿐이며 결국엔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거지노릇 그만하고 주인노릇 좀 하고 살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한단 말인가? 아무튼 이 혼란한 시대에 참으로 절묘한 한마디 법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