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8천91m)는 끝내 여성산악인 오은선(43.블랙야크)씨를 받아주지 않았다.

지난달 14일 장도에 오른 오씨는 19일 두 번째 정상도전 시도가 기상 악화 때문에 좌절되자 결국 등정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달 초 추석 연휴 기간 첫 등정 시도에서 7천400m까지 진출한 뒤 눈과 안개로 1m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화이트아웃' 현상 때문에 정상을 1천700m 가량 남겨 두고 내려와 다시 기회를 노린 오씨는 이번에는 정상 부근의 강한 제트기류와 영하 30℃를 밑도는 혹한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베이스캠프로 철수해야 했다.

칸첸중가(8천586m)부터 8천m 4개 봉우리를 연거푸 오른 파죽지세에 힘입어 올해 내 달성이 예상됐던 오씨의 여성산악인 세계 최초 히말라야 8천m 14좌 완등은 결국 내년으로 미뤄지게 됐다.

질기고 질긴 안나푸르나와 한국 산악계의 악연의 벽을 `철(鐵)의 여인, `독종'이라 불리는 오씨도 결국 넘지 못했다.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을 가진 안나푸르나는 높이는 히말라야 8천m 14개 봉우리 중 10번째이지만 험한 산세와 시시각각 돌변하는 기상 그리고 그로 인한 눈사태 위험 등 때문에 14좌 중 가장 오르기 힘든 산 중 하나로 꼽힌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천m 16좌 등정의 위업을 세운 엄홍길씨 조차도 네 번의 실패를 겪고 세 명의 동료를 잃고서야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전 세계 많은 산악인들이 이곳에 묻혔고, 한국 산악계 역시 어느 산보다 이곳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1989년 영남대 원정대원 두 명을 비롯해 1991년 인천산악연맹 원정대 두 명 등 지난해까지 14명의 한국인이 안나푸르나 설원에 묻혔다.

이번 달에도 충북 직지원정대 소속 대원 두 명이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뒤 사망한 것으로 결론나면서 안나푸르나에 묻힌 한국인 산악인의 숫자는 16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10년 전인 1999년에는 국내 여성산악인 최초로 에베레스트(8천848m)에 오른 지현옥씨가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돼 여성산악계에 큰 슬픔을 가져오기도 했다.

오씨의 이번 안나푸르나 등반은 히말라야 8천m 14좌 완등의 마지막 관문인 동시에, 고(故) 지현옥씨의 실종 10주년을 맞아 후배 여성산악인이 선배의 `한'(恨)을 풀겠다는 국내 여성산악인들의 염원이 담긴 산행이었기에 등정 포기의 아쉬움은 더욱 커보인다.

오씨는 그러나 "대자연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산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있다면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온다"라면서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악천후에 밀려 등정은 포기했지만 오씨는 이번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만큼, 내년 초에는 안나푸르나와 한국 산악계와의 `악연'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sout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