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체조협회는 지난 27일 열린 협회장 선거에서 이영훈 포스코건설 대표(59·사진)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장충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이 신임 회장은 포스코켐텍 사장을 거쳐 지난 3월 포스코건설 대표에 취임했다. 이 회장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불교의 시대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여행은 지금부터 10∼14세기의 고려 시대로 들어간다. 고려는 8∼10세기의 통일신라와 동질의 역사시대다. 국가라는 정치체로 통합된 인간 삶과 사회의 질서를 문명이라 할 때, 고려와 통일신라는 동일의 문명사에 속한다. 두 시대는 혼인, 가족, 친족, 촌락, 노동 등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동질적이었다. 그 공간을 지배하고 그로부터 각종 잉여를 수취하는 국가의 지배체제에서 두 시대는 연속적이었다. 두 시대는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 곧 종교가 대변하는 정신문화를 공유했다. 두 시대는 공통으로 불교의 시대였다.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불교의 정신세계에 의해 규정됐다.불교의 세계에서 고려의 국왕은 부처의 현신이었다. 제시된 불화는 1350년 회전(悔前)이 그린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다. 도솔천의 미륵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그때까지 구제되지 못한 대중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불화는 화려하게 단청을 한 궁전과 성벽을 경계로 그 안팎이 구분되고 있다. 안은 부처의 세계인데, 현실에서는 왕족과 귀족의 세상이다. 성벽 밖의 속세는 그들의 지배를 받는 천한 서민의 세상이다. 사람의 크기는 위에서 아래로 점점 작게 그려져 있다. 맨 아래는 밭 갈고 추수하는 농부들인데, 손가락만큼 작게 그려져 있다. 불교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은 원리적으로 평등하지만, 현실의 사바에서 귀족과 서민의 신분 차등은 신체의 대소로 명확하게 감각됐다.짧은 겉옷의 농부와 움집의 여인변상도 맨 아래의 8명은 한국사에서 그 모습이 그림으로 전하는 최초의 서민들이다. 거기엔 고려인의 생활사와 관련해 몇 가지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첫째는 쟁기로 밭을 가는 소가 두 마리라는 점이다. 제7회의 연재에서 원(元)과의 교통로에 조성한 마을 이리간(伊里干)에 200개 정호(丁戶)를 옮기면서 호당 2마리의 농우를 지급했다는 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쟁기 갈이가 이두경(二頭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둘째는 농부들이 거의 바지를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123년 중국 송의 서긍(徐兢)이란 관료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해 3개월간 체류했다. 서긍은 귀국 후 그가 살핀 고려의 제도와 현실을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으로 적었다. 그에 의하면 고려의 하층 서민은 단갈(短褐), 곧 짧은 겉옷으로 몸을 가리고는 아랫도리는 입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 모습을 변상도에서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변상도 맨 아래에는 8명의 농부 외에 1명의 여인이 추가로 그려져 있다. 여인은 움집 속에 앉아서 남자들의 일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고려 서민의 주거는 일반적으로 반지하 움집이었다. 물론 왕족이나 귀족의 집은 지상의 웅대한 저택이었다. 그와 관련해 서긍의 《고려도경》은 개경 성내의 일반 주거를 가리켜 벌집 및 개미굴과 같이 밀집해 있는데, 서까래를 양쪽에 잇대고 풀을 베어 지붕을 덮어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개경이 이러했으니 농촌으로 내려가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바로 그 점을 변상도는 숨기지 않고 전하고 있다.윤회의 고리불교의 세계에서 사바는 윤회의 한 고리일 뿐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깊은 불심에서 즐겨 불경을 필사했다. 제시된 그림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어느 사경(寫經)에 전하는 한 장면이다. 불경을 비방하다가 죽으면 구렁이로 태어나 기어 다닐 때 작은 벌레들이 비늘 밑을 빨아먹어 고통을 받고, 온몸이 옴과 버짐으로 얼룩진 여우로 태어나 어린아이들의 매를 맞고, 어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도 난쟁이, 절름발이, 장님, 귀머거리, 곱사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고려인은 일반적으로 두건을 썼는데 그 같은 복식이 확인되고 있는 점, 서민의 주거로 움집이 그려져 있는 점도 연구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이 같은 윤회의 고리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이념이나 조상신을 모시는 제례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아버지가 죄업이 많아 마당을 기는 구렁이나 매를 맞는 여우로 태어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은 부모가 사망하면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철 따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로 망자를 기억했다. 고려인들은 조상신의 엄한 눈초리 하에서 그들을 모시는 장례와 제례에 인생의 거의 절반을 투여한 후대의 조선인과는 상이한 질서의 삶을 살았다. 고려인에겐 단일 계통의 혈연 친족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고려인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 신분의 친족집단에 얽매인 조선인과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개성이었다.8祖 세계고려인은 관직에 나아갈 때 8조(祖)의 세계(世系)를 밝힌 호적을 제출해야 했다. 8조는 자기의 부(父) 쪽으로 조부, 조모, 증조모, 고조모, 모(母) 쪽으로 외조부, 외조모, 처(妻) 쪽으로 처부, 처모를 말한다. 세계는 이들 8조의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로 올라가는 남계(男系) 조상을 말한다. 따라서 8조 세계라 함은 부, 모, 처 3변으로 올라가는 32명의 조상을 가리킨다. 그 안에 천한 사람이 없어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해야 하급 서리나 군인의 지위에 그쳤다.32명의 조상이 모두 남성이어서 고려 시대가 부계(父系)사회인 듯이 보이지만 국가 제도의 형식에서 그러했을 뿐이다. 8조의 구성에서 여성이 더 많듯이 결혼, 가족생활, 상속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모계(母系)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동했다. 고려의 남자들은 대개 처방(妻方) 거주의 관습에 따라 결혼 후 장기간 처가에 거주했다. 처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계 친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고려인들이 친족의 서열과 원근을 구분한 용어는 부계보다 모계 친족을 대상으로 더 정교하게 발달했다.처용과 안길친족이 3변으로 넓게 열린 집단이듯이 그 하부 단위로서 가족도 마찬가지 속성을 띠었다. 조선 시대와 같은 일부일처의 가족제는 정립돼 있지 않았다. 《고려사》는 어느 관료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결혼을 거듭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전하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부유한 집은 3, 4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쉽게 사랑해 합쳤다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쉽게 헤어진다고 했다. 복혼의 풍습이 광범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가(處容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처용가의 내용은 통일신라를 무대로 하지만, 그것의 채집과 연주는 고려 시대의 일이었다. 고려 왕실은 즐겨 처용가를 궁중에서 공연했다. 주지하듯이 처용의 부인은 남편의 귀가가 예정된 밤늦은 시각에 다른 남자를 침실에서 맞이하고 있었으며, 처용은 그것에 관용할 수밖에 없었다.이외에 복혼의 풍습과 관련해 《삼국유사》는 안길(安吉)의 고사를 소개하고 있다. 무진주의 안길은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자 3명의 처를 불러 “오늘 밤 이 거사를 모시고 자면 그녀와 평생 해로하리라”고 했다. 2명의 처는 차라리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모르는 사람과 잘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다른 한 처는 “만약 평생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명을 받들겠다”면서 손님의 침실에 들었다. 이 역시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고려의 맥락에서 전승되고 기록된 것이다.고려의 남녀는 결혼 후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동거율에 강하게 구속되지 않았다. 안길이 3명의 처에게 평생 해로의 조건을 내건 데서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남녀 배우자는 각기 자신의 친족집단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결혼은 방문혼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에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1107년 예종은 군인의 처로 30년 이상 떠나지 않고 동거한 여인에게 상을 내렸다. 고려왕조는 가정윤리에 충실한 효자, 효녀, 절부를 포상했는데, 의부(義夫)도 그 대상이었다. 의부란 처를 버리지 않고 오래 동거한 의리 있는 남자를 가리키는 고려 시대 고유의 역사적 용어다. 장기간의 동거가 포상의 대상이었음은 그렇지 못한 결혼이 일반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근친혼도 고려 결혼의 한 가지 특색이었다. 원 복속기의 충선왕은 원의 뜻을 받들어 왕족과 양반의 근친혼을 금했다.
가장 오래된 매전(買田) 기록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높이 3.5m의 석등이 있다(보물111호).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라 한다. 개선사란 절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허물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반이 석등을 찾았을 때, 석등은 물이 가득한 논에 잠겨 있었다. 사진 자료는 1933년의 것인데 여전히 중대(中臺) 이하가 논 가운데 묻힌 상태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쇠락한 나머지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고 있는 스산한 풍경이다. 등을 밝힌 불집은 여덟 기둥으로 둘러싸였다. 그 기둥의 표면에 개선사가 석보평(石保坪)의 논을 구입하게 된 전후 사정이 새겨져 있다. 이하 ‘석등기(石燈記)’라 부른다. 석보평은 조선시대엔 석보리라 했으며, 현재는 화순군 이서면 도석리다. 태반이 동복호에 수몰됐다.석등기를 대강 소개한다. 868년 2월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이들의 큰딸(훗날의 진성여왕)이 발원해 두 등을 걸었다. 그러자 귀족 김중용이 기름값으로 벼 300석을 시주했다. 그것으로 스님 영판이 석등을 세웠다. 891년 스님 입운이 진성여왕이 하사한 벼 100석으로 경주 오호비소리에 사는 공서와 준휴로부터 석보평에 있는 대업(大業) 명의의 물가 논 4결(結)과 구석 논 10결을 정상의 절차를 밟아 구입했다.(이하 생략) 석등기는 현재 전하는 최고(最古)의 매전(買田) 기록이다. 거기에 9세기 신라의 지배체제 내지 토지제도의 실상을 전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1100년을 내려온 비밀이었다.토지재산의 실체한 가지 비밀은 매매된 토지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개선사가 14결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벼 100석을 지불했으니 1결의 가격은 벼 7.14석이다. 토지가격은 토지로부터의 순수익을 이자율로 나눈 것과 같다. 이에 토지가격×이자율=총생산×순수익률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자율, 총생산, 순수익률에 관한 정보는 100년 뒤인 992년의 것이 《고려사》에 전한다. 이자율은 40%, 1결의 총생산은 벼 12.5석, 순수익률은 당시 고려왕조가 거둔 조세율인데 25%다. 이로부터 구해진 1결의 가격은 7.8석으로 개선사가 지불한 7.14석과 사실상 일치한다.이 관계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지난 연재에서 설명한 대로 신라는 귀족과 관료에게 토지로부터 조세를 수취할 권리를 지급했다. 그것이 그들이 소유한 토지재산의 실체였다. 개선사가 매입한 것은 그 수조권(收租權)과 다름없다. 바로 그 점이 석등기가 전하는 토지 면적과 가격 정보로부터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귀족과 관료가 토지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점도 개선사가 토지를 매입하면서 정상의 절차를 밟았다고 한 석등기의 기술에서 확인되고 있다.농업혁명다른 한 가지 비밀은 삼국 통일 이후 8~9세기에 걸쳐 혁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농업의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통일 전쟁은, 특히 당과의 전쟁은 참혹한 피해를 강요했다. 신라촌장적이 전하듯이 그 전쟁에서 남자의 30% 가까이가 희생됐다. 전쟁이 끝나자 신라는 일대 승평(昇平)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대왕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에 길이 살 터전을 마련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니, 집집이 넉넉하게 돼 곡식이 산 같이 쌓였다고 그의 유언에서 말했다. 그 일단의 광경을 석등기에서 살필 수 있다.개선사가 매입한 물가 논 4결과 구석 논 10결은 석등기에 의하면 각각 5필지와 10필지로 이뤄졌다. 당시 1결의 면적은 1500평 정도였다. 이에 논 1필지의 평균 면적은 1400평이다. 반면 7세기 이전 삼국시대의 논은 단위 필지의 면적이 평균 30평에 불과했다. 관개는 구릉에서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한 자연관개 방식이었다. 그랬던 논농사가 8세기 이후 혁명적으로 변했다. 단위 필지가 47배나 넓어졌다. 그에 따라 관개도 다량의 물을 공급하는 인공관개로 변했다. 일대는 광주 무등산에서 발원한 개천이 동복호로 흘러드는 계간(溪澗) 농업지대이다. 곳곳에 개천의 물을 끌어들이는 보(洑)가 개설돼 천을 따라 펼쳐진 논을 적셨다. 석보평 또는 석보리의 ‘保’는 기록에 따라 ‘洑’로도 쓰였다. 돌로 개천을 막아 보를 열었기 때문에 지명을 석보라 한 것이다. 석등기는 보를 통한 수리 역사가 8~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이야기하고 있다.쟁기의 보급논농사만이 아니었다. 밭농사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쟁기의 보급이 그 원동력이었다. 삼국시대까지 쟁기의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쟁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의 영역에 한정되고 있다. 통일신라기에 이르면 쟁기 유적은 그 수가 일층 많아지고 그 분포도 전국적으로 광역화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쟁기의 보습에 볏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개 9세기부터다. 볏은 쟁기로 가는 흙을 한 방향으로 몰아 왕복 쟁기질로 높낮이가 뚜렷한 이랑과 고랑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콩·밀의 건조작물과 보리의 습윤작물이 같은 포장에서 재배될 수 있는 농사의 큰 진전을 보게 됐다.앞서 소개한 대로 전쟁이 끝나자 문무대왕은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쟁기가 대량으로 제작돼 널리 보급됐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무기를 녹였다고 했으니 쟁기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였다. 쟁기는 신라의 지방행정체제를 통해 농촌 구석구석으로 보급되고 관리됐다. 쟁기 유물이 대개 산성(山城)이나 현성(縣城)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신라 국왕은 전국의 토지만이 아니라 주요 철제 농구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그와 더불어 국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왕토주의가 점점 강화됐음이 8~9세기의 역사적 추세였다.인구의 증가정보가 빈약한 시대를 두고 지나치게 상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괴이한 환상이 널리 자리를 잡는다. 적절히 통제된 상상은 권장돼야 한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3세기께 한반도 인구는 110만 명 내외였다. 그 정도의 인구를 상상해야 당시 한반도의 생태에 대한 상상이 추가로 발동되는 법이다. 이후 7세기까지 인구는 통일 전쟁에 따른 혼란과 피해로 증가할 수 없었다. 이후 인구에 관한 정보를 듣는 것은 중국 《송사(宋史)》로부터인데, 고려 인구가 210만 명이라 했다. 이로부터 역사가들은 몽골이 침입하기 이전인 12세기의 인구를 250만~3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인구는 좀처럼 증가하지 않는다. 총인구가 11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증가하기 위해서는 식료 공급에서 무언가 큰 진전이 필수적이다. 나는 그 시기가 8~9세기의 통일신라기가 아닐까 상상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1인당 조세량의 변화에서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47배나 증가한 조세5회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7세기 초 고구려는 개별 세대로부터 벼 1두의 조세를 수취했다. 그런 기준으로 세대복합체와 취락에 조세를 부과한 것이다. 국가 수취의 중심은 초기 농경사회의 복합적 생태를 반영해 비단과 같은 공물에 두어져 있었다. 이후 조세의 수취 규식이 자세하게 전하는 것은 992년 고려시대 일이다. 그에 의하면 고려 농민은 1결의 논에 벼 47두의 조세를 부담했다. 당시 논 1결은 개별 세대가 보유한 경지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 7세기 초에서 10세기 말까지 개별 세대의 조세 부담은 무려 47배나 증가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1인당 경지면적이, 곧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소개한 대로 9세기 말 개선사가 구입한 논의 단위 필지는 1400평으로 삼국시대의 그것(30평)보다 47배나 컸다. 나는 출처가 상이한 수치 정보가 이렇게나 정확히 일치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2세기까지 인구를 3배나 증식시킨 농업혁명은 아무래도 석등이 세워지기 전인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석등기는 경문왕의 아내이자 진성여왕의 어머니를 문의황후(文懿皇后)라 칭하였다. 황후라는 존호! 거기엔 당(唐)을 이기고 농업혁명을 통해 승평의 시대를 연 신라의 드높은 자존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 전쟁의 희생과 뒤이은 영광이 없었다면 후대의 한국사는 존속하지 않았을 터다.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다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 문명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대 계기였다. 687년 신라는 9주와 5소경을 설치했다. 그 아래에 8세기 중엽까지 117개 군을, 군 아래에는 293개 현을 설치했다. 이로써 읍락과 국의 누층적(累層的) 연맹에서 출발한 신라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의 관료제 형태로 일신했다. 인구와 토지에 대한 집권적 지배체제도 강화됐다. 722년 신라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다”고 간략히 전할 뿐, 정전이 무엇인지, 어떻게 지급했는지 등에 관해선 아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이하 당시 시행된 토지제도를 정전제(丁田制)라고 부른다.정호의 하사204년이 지난 926년은 고려와 후백제가 통일전쟁을 벌이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벽진의 성주 이총언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해 이총언을 벽진의 장군으로 임명한 다음, 벽진의 정호(丁戶)에 더해 이웃 고을의 229개 정호를 추가로 하사했다. 9년 뒤에는 신라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경순왕을 예우하기를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에 임명하고 1000정(丁)의 토지를 지급했다. 이 두 비슷한 사건에서 언급되는 정호와 정이 722년의 정전제에 그 기원이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호든 정이든 그것은 공통으로 일정 규모의 노동과 토지를 결합한 생산의 기초 단위이자 국가 지배의 기초 단위를 말했다.뒤이은 고려시대에도 정호의 실체는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8~9세기 통일신라와 10~14세기 고려는 동질의 역사시대다. 필자는 정호가 사회 구성의 기초를 이룬 8~14세기를 한국 문명사의 제2 시대로 구분한다. 정호는 15세기에 들어 해체되지만 그 유제(遺制)는 이후에도 한참을 뻗쳤다. 1722년 조선왕조가 만든 양안(量案), 곧 토지대장을 보면 5결(1결은 약 2㏊) 단위로 토지를 구획한 다음 ‘OO정(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역사적 기원은 722년의 정전제였다. 꼭 1000년의 세월이었다. 역사의 흐름은 그렇게 길고 느렸다.8가와 8결의 세대복합체전하는 기록에서 정호의 실체가 명확해진 것은 1107년 윤관 장군의 여진 정벌에 관한 《고려사》 기사에서다. 윤관은 그 지역에 6성을 쌓고 남쪽 지방의 백성을 옮겼다. 백성의 수에 관해 《고려사》는 두 종류의 통계를 전하고 있다. 하나는 6466정호이고 다른 하나는 5만2000호다. 어느 두 사람이 상이한 기준으로 백성의 수를 헤아린 결과다. 호는 소규모 세대로서 가(家)를 말한다. 성질상 정확히 헤아릴 수 없어 5만2000이라는 어림수로 보고됐다. 반면 정호는 한 자리까지 정확히 헤아려진 공식 보고의 통계다. 이로부터 고려의 정호는 평균 8가로 이뤄진 세대복합체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정호가 어느 정도의 토지를 보유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있다. 1279년 원(元) 복속기의 일이다. 고려와 원의 교통로에 이리간이란 마을을 조성하고 남쪽 지방의 부유한 농민 200정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당시 정호마다 농우 두 마리와 암소 세 마리, 8결의 토지를 지급했다. 다른 기록들도 정호의 토지를 평균 8결이라고 전하고 있다. 1399년 조선왕조 창건에 공이 큰 조온이란 공신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문서가 작성됐다. 그에 의하면 경기도 15개 군현에 분포한 도합 2450개 들판의 규모는 평균 17결과 8결의 쌍봉으로 분포했다(여기서 1결은 약 1㏊). 다시 말해 고려의 정호는 8결의 들판을 공동 점유한 8개 세대의 복합체였다. 17결의 들판은 두 개의 정호로 나뉨이 보통이었다. 7세기 말 신라촌장적에 나타난 공연이란 세대복합체에는 9등급이 있었다. 그것이 8가와 8결의 규모로 표준화하는 농민 존재 형태에서의 발전에 힘입어 722년의 정전제가 시행됐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왕토주의는 픽션이 아니다이전에 지적한 대로 삼국의 발전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대왕(大王)의 권력이 성장했다. 그에 따라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국왕 소유로 간주하는 왕토주의(王土主義)라는 정치이념이 성숙했다. 722년의 정전제 시행은 그 정치이념을 전제하고 그에 추동됐다. 종래 왕토주의는 비실체적인 관념이거나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토지가 귀족과 관료의 사적 재산임을 보이는 몇 가지 사례에 근거해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은 그 사적 재산의 실체와 특질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조성되고 관리됐는지,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라의 토지제도에서 귀족의 수조권(收租權)과 농민의 경작권(耕作權)이 한 토지에서 중층적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에 주의를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토지가 귀족의 사적 재산으로 처분된 것은 그런 구조를 전제해서였다.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토지가 상업적이고 비인격적인 재산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었다.공전과 사전의 대립과 통합왕토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798년 원성왕이 죽었다. 신라 왕실은 왕도 주변의 곡사라는 절의 터와 주변의 구릉을 능역으로 수용하면서 그 일대를 소유한 어느 귀족에게 2000석의 벼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비록 왕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다”고 했다. 920년께 지증대사라는 귀족 출신 고승이 이천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문경 봉암사에 기증했다. 그를 위해 지증은 요로의 지인을 통해 헌강왕의 허락을 구했는데, “비록 나의 토지라고 하나 왕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헌강왕은 지증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천에 관리를 보내 그의 농장을 측량했다.두 사건에서 이야기를 하는 주체는 다르지만, 그 취지는 사실상 동일하다. 신라의 국토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뉘었다. 두 범주는 갈등하고 대립했다. 그렇지만 보다 상위의 왕토라는 범주로 통합됐다. 공전은 왕실에 속하는, 왕실이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은 귀족에 속하는, 귀족이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의 기원은 757년에 문무 관료에게 차등 지급한 녹읍(祿邑)에 있었다. 경주 출신인 지증대사가 이천이란 먼 곳에 농장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러고도 경작, 수취, 운반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신라에 의해 지급되고 관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귀족은 사전을 세습적 가산으로 향유했다. 그 권리는 왕이라고 해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이 귀족의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귀족의 권리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세습적 가산이라고는 하나 그 실체는 국가가 지급하고 관리하는 수조권이었다. 귀족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지만, 소정의 절차에 따라 왕의 허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은 그리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9세기 나름의 역사적 시공지증의 사례에서 보는 왕의 재가를 두고 절에다 재산을 함부로 바치는 폐단을 억제할 목적에서 취해진 공적 규제라는 해석이 있다. 토지 재산에 대한 그런 정도의 규제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왕토주의는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같은 해석은 한마디로 몰역사적이다. 긴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보편적인 범주는 그 예가 드물다. 9세기는 다른 시대와 혼동될 수 없는 제 나름의 역사적 시공(時空)을 지닌다. 역사가는 전후좌우를 살피며 각 시대 고유의 시공을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예컨대 9세기 신라 귀족의 농장은 이후 어떻게 됐나. 10~14세기 고려시대에 걸쳐 건재했나.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범주라면 그래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다. 신라 귀족의 농장은 신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고려왕조의 집권체계가 강화됨에 따라 귀족들의 농장은 11세기 말까지 현저하게 약화하거나 소멸했다. 이후 고려왕조의 녹봉제와 녹과전(祿科田)을 거쳐 조선왕조의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전혀 별개의 토지제도가 펼쳐졌다. 그 역사를 밀어붙인 한편의 힘은 왕토주의였다. 한마디로 8~14세기의 토지제도는 국왕의 공전과 귀족·관료의 사전이 밀고 당기는 역사였다. 드디어 15세기에 들어서 개인이 토지를 자유롭게 사고파는 시대가 열렸다. 그 역사에서 8~10세기의 왕토주의는 유년기에 해당했다. 그 미약함을 두고 노년기의 쇠약함을 연상해서는 곤란하다.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