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前 그 사건…'강기훈 유서대필' 재심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강기훈 씨(48·사진) 유서대필 사건을 법원이 다시 판결(재심)하게 됐다.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19일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결정에 대한 검찰의즉시항고를 기각했다. 조만간 이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재판에 들어가게 된다.

강씨 유서대필 의혹은 1991년 5월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울 서강대에서 분신 자살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던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필,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검찰이 내세운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 유서의 필적이 강씨 필적과 같다는 것이었다. 강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받고 1994년 출소했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김씨가 생전 남겼다는 기록에 나타난 필적을 바탕으로 다시 감정을 의뢰하자, 유서의 필적과 강씨 필적이 다른 반면 김씨 필적과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위원회는 이 사건을 재심할 것을 권고했고, 서울고법은 2009년 재심 결정을 했지만 검찰이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즉시 항고했다. 대법원은 3년 넘게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아 그동안 비판을 받아 왔다.

재판부는 “강씨가 유죄 판결을 받는 데 주요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필적 감정인들의 증언이 허위인 이상 이 사건은 다시 판결해야 한다”며 재심 결정 이유를 밝혔다. 위원회에서 일부 감정인들이 “실제로 감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감정서에 서명날인을 한 게 전부였다”며 과거 진술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위원회의 감정 결과에 신빙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김씨가 생전 필적을 남겼다는 수첩, 업무일지 같은 새로운 증거 역시 실제로 김씨가 작성한 것인지도 불명확하다”고 판단, 필적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강씨는 대법원이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재심결정은 당연하다”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강씨는 언론을 통해 “재심은 당연한 결과인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끌었는지 모르겠다”며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재심이 시작돼도 20년 전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재판 자체는 의미가 없다”며 “재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20년 동안 재심을 위해 준비해왔다”고 덧붙였다. 강씨는 “지난 20년간 매우 암울했고 바닥을 기는 느낌이었다”고 사건 이후 고통 속에 보낸 삶을 간명하게 표현했다. 강씨는 지난 5월 간암 수술을 받고 지방에서 요양하다 최근 경기도 자택으로 돌아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